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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약용의 고해 본문
다산이 아닌 인간 정약용의 삶을 들여다본다
정약용(1762~1836)은 어떤 사람일까? 정조의 지시로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데 쓰인 거중기를 만든 사람 또는 목민심서를 쓴 사람 정도로만 역사 공부를 했을 뿐 그저 많은 조선시대의 선비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관심 있는 만큼 알게 된다. 지난 5월 10일 강진청렴연수원, 다산초당, 백련사 등을 다녀온 이후로 '정약용'은 항상 책상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작년 가을에 샀다가 순서를 미뤄놓았던 책 <정약용의 고해>에서 다시 정약용을 만난다.
저자 신창호는 고전학자이자 교육학자로 고전을 오늘날의 시선으로 되짚어보고 지금 여기에 적용하려는 저술 작업에 열정을 쏟고 있으며 고전과 인문학 강의도 진행한다. <일생에 한 번은 논어를 써라>등 20여 종의 책을 썼다. 저자는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낯섦'이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다산 정약용'이라고 부르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저술을 집대성하여 '여유당전서'라 명명했고, <자찬묘지명>에서 다산에서의 삶은 간략하게 기록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나이 예순에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에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를 들여다보려고 했다.
'정약용은 천주교에 매력을 느낀 학자일까? 성리학을 거부한 반주자학자일까? 서학까지 포용하며 근대를 지향한 진보적인 지식인일까? 이전의 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사상가일까?'(7p)하는 의문들 속에 정약용이 있다는 것은 세간에 그의 진면목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는 '고해(告解)'라고 해석하고 정약용이 스스로에게 고백과 용서를 담아 쓴 <자찬묘지명>에 입각하여 인간 정약용의 마음을 헤아린다. '고해(告解)'는 고해성사(告解聖事)의 고해다. 19년을 유배지에서 지내고 이후 18년을 고향에서 살았지만 생의 절반을 죄인으로 살았던 정약용은 스스로도 "나는 죄인이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뉘우침으로 점철되었다."(10p)고 말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어릴 적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20년 동안 세속의 길에 빠져 다시 선왕의 훌륭한 정치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여가를 얻게 되었다.'(135p)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천주교에 입문한 정약종(형), 이승훈(자부), 황사영(질부) 등이 죽임을 당한 것에 비하면 정약전(형)과 정약용의 유배는 크게 감형한 결과였다. 그 여가에서 정약용은 머물러 있지 않고 <논어>, <맹자>, <주역>, <대학> 등의 책들을 다시 읽고 학자로서의 견해를 밝혔으며, 자신의 학문으로 재탄생시킴과 동시에 국가 경영과 백성을 다스림, 범죄와 재판, 의학까지 섭렵하여 집대성했고 저술로 남겼다. 방대한 영역에 놀라고, 엄청한 분량의 창작물에 놀란다. 정약용이 서학과 천주학을 받아들인 것과 별개로 유배지에서 유학에 집착했던 대목은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순수한 학문의 발로였는지 천주교에 심취하여 세상을 바꾸려 했다는 죄를 뒤집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
천주교로 몰락한 집안의 학자, 천주교를 배신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전한 학자, 세상을 개혁의 대상으로 보았던 실패한 진보주의자 등으로 생각하기 쉬운 정약용의 삶의 그림자를 따라가면서 인간적인 고뇌와 화해, 용서의 영역까지 찾아낸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정약용에 대한 연구와 이해를 통해 이전보다 한층 깊게 정약용에 대해 알 수 있다. 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시대적 배경이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이고 왜란과 호란을 겪어 새로운 문화와 문물이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함께 유입된 천주교를 탄압의 이유로 악용한 정치 세력을 보면 현대의 정치가 오버랩된다. 안보 문제가 시도 때도 없이 시대적인 문제들을 덮어버리지 않던가. 인간 정약용에 대해 깊이 침잠하게 되는 책이다. 그러나 이 또한 저자 신창호의 생각일 뿐 정약용의 생각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남긴 책으로 추측하고 천주교에서는 정약용이 배신했으나 한 번 세례를 받았으니 신자라고 말하고, 반대 쪽에서는 정약용은 학문과 종교를 구분하였다고 말한다. 주자학이 이성만을 중시하는 데에 의문을 품고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는 서학에 흠뻑 반한 학자는 결국 100년을 앞선 생각으로 정치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배지에서 쓴 유학 공부는 학문(學問, 배우고 묻는다)의 결과물로 남았다. 그리고 후대에 좋은 학문의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다산학(茶山學)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어려움을 힘으로 바꾸는 것이 큰 정신의 특징이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새로이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강진은 중죄인의 유배지였으나 어머니의 고향이었고 가까운 해남에 자리잡고 있는 해남윤씨 가문이 가진 서적은 학문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책을 완성할 때마다 흑산도의 정약전(형)에ㅔ 소식을 전하여 격려를 받은 것 또한 학문을 계속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으며 백련사(만덕사) 주지인 초의선사와의 교류도 자신을 알아봐 주는 친구가 있다는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 강진에 머물면서 들여다 본 백성들의 삶은 정약용이 선비가 아닌 일반 백성의 눈으로 정치와 경제를 보게 했으며 그 결과 <목민심서>, <흠흠신서>와 같은 책을 저술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배 이후 18년 동안 유배지에서의 저술 기록을 남양주에 머물면서 주변의 교우들과 논의하고 가다듬었다고 한다. 진정한 학자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책 너머의 삶을 생각하고 연구하게 하는 책이다. 정약용선생님에 대한 저자의 긴 연구와 고민과 학자로서의 존경을 짐작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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