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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서평]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본문
처음 이반 일리치라는 이름을 보고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이반일리치와 일치하는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일 뿐 전혀 다른 이름인 걸 알게 되었다.
작가 이반 일리치는 1926년에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반유대인 정책을 벌인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이탈리아로 피신하고,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교황청 근무를 마다하고 뉴욕에서 박사학위를 받던 중 빈민가에서 푸에르토리코인들의 가난한 삶에 함께 했다. 이후 푸에르토리코 가톨릭대학교 부총장, 총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기록을 바탕으로 <학교없는 사회>를 출간하였다.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를 비판하며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도구의 성장에 한계를 부여해야 한다는 논리를 예리하게 펼친 <공생을 위한 도구>에서 그는 “소비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노예가 생겨난다. 하나는 중독에 속박된 노예이고 또 하나는 시기심에 속박된 노예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1975년 <의학의 응보>를 출간하면서 “의료 시설은 건강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라는 첫 문장으로 사회비판을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이듬해 <의학의 한계>로 확장하여 출간하였다. 이후 1977년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들>, 1978년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The Right to Useful Unemployment and Its Professional Enemies)를 출간한다. 그는 이 책에서 “유용한 실업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다. 이 개념은 시장을 위한 상품 생산 바깥에서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유용한 활동을 다룬다. 전문가들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경제학자들이 측정하지 못했고 측정할 수 없는 이러한 활동들이 진정으로 만족감, 창조성, 자유를 낳는다고 말한다. 이후 <필요의 역사를 향하여>,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글을 쓴<그림자 노동>를 저술했다. 남성과 여성의 노동이 아닌 성별이 배제된 노동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젠더>를 출간했으나 많은 비방을 받았다고 한다. 또, <박물관 학교>등의 책이 있다.
이반 일리치는 76세가 되는 2002년 독일에서 숨졌다. 50대 중반이후 얼굴 한쪽에 자라난 혹 때문에 고통을 받았으나 병원 치료를 받지 않고, 침술, 요가, 아편, 자기수양으로 통증을 이겨내려 했으며 그 이유에 대해 “나는 헐벗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작가는 관심사를 밝힌다.
‘나의 관심사는 현대화된 가난이 인간에게 끼치는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결과이며,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의 인내이며, 이 새로운 비참함에서 벗어날 가능성이다.(15p) 나의 목표는 인간을 오로지 좌절시키기 때문에 항상 부당한 이 시대의 거짓 풍요를 발견하고 고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재생에 영감을 주는 이론이 가능해질 것이다. (16p)
1. 날마다 무더기로 상품을 쏟아내어 사용가치의 자율적 창조를 마비시키는 상품. 시장 의존 사회의 특징을 묘사하려 한다.
2. 이 시장 의존 사회에서 필요를 만들어내며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숨겨진 역할을 파헤치려 한다.
3. 진실을 감추는 환상을 벗겨낸 다음, 시장 의존을 영구화하는 전문가 권력을 허물어낼 전략을 제안하고자 한다.(19p)
그리고 해결 방안도 제시한다.
'정치적 절차를 통해 한 사회가 생산할 부와 일자리에 한계를 설정해야만 부와 일자리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져 누구나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 ‘공생의 정치’는 이러한 통찰에 근거한다. 과도한 부가 생산되거나 고용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아무리 잘 분배하더라도 평등하고 생산적인 자유를 누리는 데 필요한 사회적, 문화적, 자연적 조건이 파괴되고 만다. 비트bit와 와트watt(에너지의 단위)가 어느 한계를 넘어 대량 생산 상품에 과도하게 투입되면 필연적으로 인간은 ‘가난하게 만드는 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한 사회의 가장 힘없는 사람에게서 자유와 해방을 빼앗는 파괴적인 부이다.(17p)
본문에서 이반 일리치는 현대 사회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 전문가 집단화 되어가는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어떤 문화든지 교환될 수 없는 사용 가치가 반드시 그 중심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구성원 대다수에게 만족스러운 삶을 위한 규범을 줄 수 있다. 산업사회는 이 중심을 허물어버린다. 문화란 인간이 행위를 하기 위한 규범이지 기업이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규범이 아니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는 민간기업이든 국영기업이든 가격으로 측정되는 생산물로 문화의 중심을 오염시키고, 인간이 스스로 행동하고 만드는 능력을 감퇴시킨다. 결과적으로 이 사회는 거대한 제로섬 게임으로 바뀌었다.(31p)
이 시대는 학교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은 무엇을 처방받아야 할지 배우고, 나머지 3분의 2는 자신의 습관을 관리하는 저명한 전문가의 고객으로 살았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이 시대의 여행이란 단체로 몰려다니며 낯선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의미했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55p)
교육자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정할 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 배우는 것은 쓸모없다고 못 박을 수 있다....... 교육자, 의사, 사회복지사 같은 오늘날의 전문가는 마치 사제나 변호사처럼 합법적으로 권력을 확보하여 자신들만이 필요를 만들고 제공하도록 법을 제정한다. 그들은 현대의 국가를 지주회사로 만들었다. 이 지주회사에 딸린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승인한 사업을 벌인다. (58p) ‘선생님’ 보다 훨씬 막강한 권한을 부리는 학교 교사는 학생이 무언가 배울 게 생길 때마다 자신이 반드시 개입할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64p)
최근에 의학이 단순한 직종 이상으로 영향력을 지니게 되면서 의료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공공 규범을 세우겠다며 입법권을 침해한다. 지금까지 의사란 질병이 무엇 때문에 생겨나는지를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의료 전문가는 사회가 어떤 질병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지를 결정한다. ...현대에 막강해진 의사는 치료해서는 안 될 사람을 골라서 낙인찍는 사람이다. (67p)
민주주의에서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권력은 시민들 스스로에게서 나와야 한다. 하지만 중요 권력을 견제할 시민의 힘은 제약당하고 약화되다가 전문가 집단이 교회처럼 막강해지고부터는 아예 소멸되었다. 국회가 전문가의 견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면, 그 정부는 국민을 위한 정부일지는 모르나 국민에 의한 정부는 결코 아니다. (68p)
전문가의 처방은 늘고 인간의 자신감은 줄어들었다.... 사람을 데려다 필요를 배우는데 유능한 학생으로 만드는 사회에서는 스스로 경험한 만족에 기반해 자신의 욕구를 만드는 능력은 보기 드물어진다. 아주 부자이거나 몹시 가난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의 필요가 소규모 부품으로 쪼개지고 각각의 필요를 해당 전문가가 관리하면서 소비자는 더 애를 먹게 되었다. 다양한 관리자들이 따로따로 제공한 서비스를 통합해 의미 있는 전체로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72p)
인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집중치료를 받는다. 삶은 마비되었다. (77p)......인간의 자율적인 행동은 상품이 늘고 치료가 과다해지면서 마비되었다. 그러나 이 만족감의 상실에 대해 어쩌다가 산업사회에 맞지 않다 보니 잃어버리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애초에 상품을 만들어 바꾸려 했던 그런 결과는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없는 무력감이 생긴데서 비롯한 것이다. 자동차, 의사, 학교, 관리자는 소비자에게 참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것이 되었다. 상품을 통해 가치를 얻는 이는 서비스 제공자 뿐이다. (82p)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다. 시간을 빼앗는 자동차에 갇히고,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에 잡혀 있고, 병을 만드는 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사람은 기업과 전문가가 만든 상품에 어느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잠재력이 파괴된다. (84P)
이반 일리치는 이렇게 묻고 있다.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인가?
직장에 고용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인가?
그리고, 빼앗기고 잃어버린 인간 능력과 창조적 삶을 회복하기 위해 ‘쓸모있는 실업을 할 권리’를 주장한다.
이 책은 술술 읽히는 책이 아니다. 뭔가 불편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답답함을 꼭집어서 설명해 준다. 산업사회로 변모하면서, 사람을 앞서는 과학 기술이 생겨나면서 사람이 인내해야 하는 분야가 많아졌음을 말해 준다. 더 끔찍한 것은 이것이 제로섬게임(한쪽의 이득과 다른 쪽의 손실을 더하면 제로(0)가 되는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로 불렸던 이반일리치의 글은 날카롭고 곳곳에 난해한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작가의 시선은 ‘불편한 진실이고 냉철한 판단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능력 위주의 세상이 된 지금 주변에 전문가가 넘쳐난다. 그러나 부분만 아는 전문가만 있을 뿐 전체를 아우르는 담론을 펼칠 사람은 없다. 집을 혼자서 지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또 그 집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설계 따로 건축 따로 허가받은 전문가만이 집을 지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거대한 세상의 물결 속에서 때때로 의문이 생겼으나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던 내용, 누구에게 물을 수 없는 내용에 대해 작가에게 비밀리에 전해 들은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절판되기를 반복하는 책이다. 누구도 찾지 않다가 몇 권 판매되었다가 다시 절판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호기심을 가진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세상의 변화가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한 분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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