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불. 흙.바람 +나

[서평] 권혁웅<마징가 계보학> 본문

서평쓰기

[서평] 권혁웅<마징가 계보학>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1. 8. 1. 23:43

 

 작가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추천하는 책 중 하나다. 마징가제트는 1972년~1974년 일본 후지 TV에서 방영한 만화영화다. 우리나라에서도 방영했다. 마징가제트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천재 과학자 헬 박사로부터 세상을 지켜내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권혁웅은 마징가제트를 TV에서 보고 자란 세대다. 그 시절의 삶 속에 스며있던 이야기들이 마치 흑백영화처럼 툭툭 튀어나온다. <마징가 계보학>은 시인이 서울 어느 골목이 복잡한 마을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젊은 시절에 이르기까지의 자신과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시로 엮어냈다.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

방 밑창에 숨겨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

접시들  - 중략 -<선세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시인이 살았던 시대를 알려주는 첫 번째 시이다. 그 시대는 현직 대통령의 서거, 광주민화운동 등으로 시절은 하수상하였으며, 정권을 차지한 군부정부를 부정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시위와는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 또다른 역사가 시 속에서 펼쳐진다.

 

기운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중략)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마징가 계보학>

 

이 시에서 나온 천하장사의 아내는 천하장사(마징자Z)에게 폭력을 당했으나, 천하장사는 오방떡 만드는 사내(그레이트 마징가)에 의해 폭력을 당하고, 편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건만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짱가)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그랜다이저) 계보로 이어진다.

 

 시인의 시를 들여다 보면 만화 주인공들이 대거 출현한다. 먼저 언급한 마징가제트와 미키마우스, 스파이더맨, 드래곤, 드라큘라, 독수리오형제, 슈퍼맨, 배트맨, 엑스맨, 아톰, 원더우먼, 황금박쥐 등 익숙한 이름들이다.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만화 주인공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살아내기 위해 감내해야 할 몫이 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미키, 밤마다 머리 위에서 머리 속에서 놀던

미키, 내 대신 천장에 오줌을 지렸던- (중략)-<미키마우스와 함께>

 

거미인간에 관해 말하자 넒은 마당의 위아래,

전후좌우, 동서남북을 샅샅이 훑던 그의 거미

손에는 걸리지 않는게 없었다. (중략)-<스파이더맨>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산 186번지 넒은 마당

솜틀집에는 용구 엄마, 용구 아빠와 용구, 용

철이와 용숙이가 살았다.-(중략)<드래곤>

 

 위의 만화 주인공이 등장하는 제목의 시들도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엇비슷한 삶을 산다. 위대한 일을 하지 않고, 그저 어느 마을 골목에나 있었던 이야기를 안고 사는 삶들이다. 버드나무 슈퍼(슈퍼맨), 낙원 이발관(아톰), 떡집, 정복이네(독수리 오형제), 삼선교회등 너무나 친숙한 이름이 아닌가?  가난한 삶은 시의 여기 저기에 살아서 움직이듯이 맨 살을 드러낸다.  거기에 사춘기를 선데이 서울에서 발견하고, 발전해 갔던 애마부인, 차타레부인, 보바리부인에 이어 죽부인까지에 이르는 성(性)에 관련한 시들도 너무나 담담하게 시 속에서 흐르고 있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누구나 들어봤을 영화의 제목들이다.  한켠으로 밀어둔 흑백사진을 꺼내 보는 기분이 내내 시 속에 녹아있다.

 

 황현산 평론가는 해설에서 이 시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마징가 계보학>은 필경 이 시집의 저자였을 화자가 서울의 가난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목도하고 살아낸 비참하고 절망적인 삶을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와 유머의 그물로 엮어낸 모욕과 굴종과 폭력의 족보다. -128p

 

  나는 시<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에서 시인의 계보를 발견한다.  시인은 잊고 싶었던 과거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끄집어 내서 글로 쓰면서 잊고 있다. 아니 기억에서 끄집어 내서 바람에 훌훌 털면서 먼지 앉은 흑백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들여다 본 사진을 글로 쓴다는 건 더 큰 용기다. 그 용기 덕에 아버지가 날린 비행접시도 있고, 어머니의 염병과 시인의 수두와 이모, 삼촌, 이웃들의 이야기가 줄줄이 따라 나오고 있다. 

 

느티의 가계에도 내통이라는 게 있지

구석구석 푸른 구름을 거느리고 있지

(중략)

저 너머 선산에서 할머니가 걸어나오지

(중략)

그와 나 사이엔 이심전심이 있지 아버지가 뒤엎은 밥

상처럼

바람이 쏴쏴 밀려나오지

-(중략)<내게는 느티나무가 있지2>-

 

 시인은 잊고 싶은 시간이지만 또한 그리운 기억들이 스민 시간들을 찾아서 쓰면서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시인의 시 <수면>을 보자.

 

 작은 돌 하나로 잠든 그의 수심을 짐작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름치마처럼 구겨졌으나 금세 제 표정을 다

림질했다 팔매질 한 번에 수십 번 나이테가 그려졌으니

그에게도 여러 세상이 지나갔던 거다 -<수면> 전문-

 

그 시간들은 세상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들의 시간이기도 하였고, 그 안에는 나이테처럼 여러 겹의 세상이 있었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던 것들이 이제는 알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계속 역사를 써 내려가고,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