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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사인<가만히 좋아하는>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1. 8. 6. 20:04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하나 떨어져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 볼 길 밖에 없는 내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조용한 일> 시 전문-

 

  이 시집을 알기 전에  위의 시 <조용한 일>이라는 시를 먼저 알았다. 그림같은 시다. 왠지 마땅치 않다는 건 날씨가 무덥고 마뜩치않아서 권태롭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뜨거운 여름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서 대지는 뜨거운데 해는 저물고 나무 아래 앉아서 낮에 쌓인 무더위를 식히고 있다. 낮에 내내 더위에 시달렸으니 좀 쉬고 싶은 저녁이다. 바람 한 점이 그리운 저녁이다. 그 저녁에 낙엽이 한 잎 떨어진다. 떨어질 때도 아닌 나뭇잎이 철도 모르고 떨어진다.  그런다고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있는가? 그저 바라볼 수 밖에.  그런데 이 나뭇잎이 떨어져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다. 나의 고됨과 어찌할 수 없음을 아는 양 저대로 있으니 나는 저 나뭇잎이 옆에 있어서 고맙고, 가만히 있어줘서 고맙다.

 

 김사인 시인의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은 <밤에 쓰는 시집>에 이어 두번째로 낸 시집이다. 임우기님의 해설에 의하면 19년 만에 엮어내는 두 번째 시집이다.  또 시인의 말에 의하면 고 신동엽 시인의 그늘에서 2년 안에 쓰기로 한 시집을 19년 만에 내니 감회가 새롭다고 전한다.

 

 임우기님은 해설에서 김사인 시인의 시를 보고 백석시인을 떠올린다.  작가마다 그림으로 표현되는 이미지가 있게 마련인데 김사인 시인의 시는 옹달샘에 물이 고이면 퍼 낼 수밖에 없듯이 가만 가만히 쌓이는 물과 같다.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꽃> 시 전문-

 시인의 시는 조용하지만 속으로는 신열을 앓는 치열한 삶 속에서도 '살아야지'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의 일을 이야기 한다.  '일어나서 새끼들 밥 해 멕여 학교 보내야지'라고 하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이 보다 진솔하게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사람 사는 일 그러하지요

한세월 저무는 일 그러하지요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

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 손만 부비며 돌아옵니다.  -<춘곤> 시 전문

 

'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 무릎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 <공부> 시 전문-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따뜻하고, 눈망울이 맑은 사람을 보는 듯 순수함이 그대로 보입니다.  봄에 보릿고개 넘기가 어려웠던 시절 빈손으로  돌아오는 마음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지만 그 심정을 '빈 손'만 부비며 돌아오는' 으로 표현하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그 안에 있다.

 

 위의 시 <공부>는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에 실리지 않은 시이다. 아마도 이전 시집 <밤에 쓰는 편지>에 실린 작품인가 보다. 김사인 시인의 시 중 알려진 시다.  ' 다 공부지요' 이 말에는 실망도, 한숨도, 실패에 대한 쓰라림도, 승리에 대한 오만도, 견디다 못해 내려놓는 체념도 다 들어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왜 어른들은 어른이면서 계절 하나 마음대로 못해서 이렇게 춥게 살고, 덥게 살까?'라는 생각한 적이 있다. 아마 예닐곱살 때였나 보다.  어른이 그만큼 커 보이고, 대단한 존재로 인식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안다. 오십이 넘은 나이가 되어보니 세상 이치가 보이고,  흘러가는 물을 막으면 안 되고, 부는 바람을 막으면 안 되고, 가는 사람을 잡으면 안 되고, 오는 사람을 막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어른들이 만약 계절을 어쩔 수 있었다 해도 손 대면 안되는 것 중 하나다.  여름날 뜨거운 땡볕이 있어야 맨드라미가 빨갛게 익어가고, 봉숭아 열매 코투리가 그 햇빛에 견디다 못해 툭! 하고 터질 수 있다는 걸 어른들은 안다. 김사인 시인도 그걸 알고, "다 공부지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시집은 맑은 풍경소리를 들으면서 찻집에 앉아 읽어도 좋은 시집이다.

코로나로 못 만난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 일찍 카페에 가서 읽고 싶은 시집이다.

인심 좋은 주지스님이 계신 절의 마루 한귀퉁이에 앉아서 바람이 살살 부는 날에 읽고 싶은 시집이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커피를 앞에 두고 읽고 싶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