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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고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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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고찰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1. 5. 28. 14:42

<필경사바틀비>에서 발췌

왜 바틀비는 안 하기를 택했을까?

 

   이 소설은 관점이 주인공 변호사의 관점이다. 그의 관점에서 바틀비가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그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관점에서 바라본 바틀비가 변화하는 모습이라는 점이다. 그는 바틀비를 고용한 고용주이고, 중산층이다. 바틀비는 쓸모에 따라 결정되는 노동자라는 점이다. 저자는 아마도 사람이 쓸모에 의해 간주되는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지 않을까 한다. 마치 카프카가 작품 <변신>에서 하루아침에 커다란 곤충으로 변해버린 사람에 대한 진정한 존재 가치와 의미에 대해 묻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틀비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바틀비가 무엇을 “선택”할 수 없도록 몰아간다. 그래서 바틀비는 자신에 대한 선택을 점점 “안 하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바틀비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점점 우리가 선택할 폭은 줄어들고, “해야 하는” 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지는 않은 지 모를 일이다.

 

주인공 변호사는 어떤 인물인가?

 

   변호사는 중산층이고, 먹고사는 데에 불편이 없으며, 고용주로서 고용된 사람들에 대해 쓸모 있으면 쓰고, 쓸모가 없으면 버리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나로 말하자면 젊어서부터 줄곧 평탄하게 사는 게 최고라는 깊은 확신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다. 따라서 활기차고 흥분하기 쉬우며 더 나아가 소란에 휘말리기까지 한다고 흔히들 말하는 직종에 몸담고 있지만 나는 그런 일로 마음의 평안이 깨지는 일이 없었다.... 편안한 은신처가 주는 유유한 평화로움 속에서 부자들의 채권이나 저당권, 등기필증을 다루며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벌이를 한다.... 우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단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건대 이 일을 하며 내가 그의 이름을 고 존 제이컵 에스터(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의 의뢰를 받지 못한 적은 없다. (p.10)

 

   고용주 변호사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 부자들의 부에 기대어 작은 일감으로도 꾸준히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직원들을 별명으로 불렀다. 터키, 니퍼, 진저 너트라고 불렀다. 또 그는 직원을 소개할 때 쓸모에 의해 평가한다. ‘그의 모든 결점과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점들에도 불구하고 니퍼 스는 그의 동료 터키처럼 내게 매우 유용한 사람이었다. ’(p.21)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으로 필사했다.....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p.27)

두 번째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변호사는 “터키”와 “니퍼” 그리고 “진저너트‘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모두 변호사의 편을 든다. 그러자 바틀비를 향해 ”이들이 말하는 걸 들었지? 이리 나와서 자네 임무를 다하게. “라 말한다.  그는 고용주로서 바틀비에게 말하고, 이를 듣지 않는 바틀비를 설득하고, 협박하기 위해 동료 직원을 동원하여 고용주의 힘을 과시한다.

 

주인공은 바틀비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타산적인 기분이 나를 엄습한다. 내가 최초로 느꼈던 감정은 순전한 우울과 진심 어린 동정심이었다. 그러나 바틀비의 쓸쓸함이 내 상상 속에서 점점 커져갈수록, 그만큼 바로 그 우울은 두려움으로, 그 동정심은 혐오감으로 녹아들었다. (p.50)

이제 그는 내게 목걸이로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감당하기 괴로운 맷돌이 되어 있었다.(p.59)

 

 

그들이 일하던 월 스트리트 사무실은 어떤 환경인가?

 

   나의 사무실은 월 스크리트 00번지 2층에 있었다.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여되어 있어서 특히 단조롭다.....그 쪽 창 밖으로는 높은 벽돌 벽이 환히 내다보였다.... 주변 건물들이 매우 높고 사무실이 2층에 있어서 그 벽과 사무실 건물 벽 사이의 공간은 거대한 사각 물탱크와 적잖이 흡사했다.(p.11)

  사무실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한족은 필경사들이 사용해도, 다른 한쪽은 내가 사용했다. 나는 기분에 따라 문을 활짝 열어놓거나 닫아놓았다. 바틀비는 접문 옆 구석 자리를 주기로 결정했다.... 자잘하게 해야 할 일을 생각해서 쉽게 부를 수 있는 곳에 이 조용한 청년을 두고자 함이었다. (p.25)

 

다시 말해 그들이 일하는 사무실은 사방을 둘러싸인 벽으로 인해 나무 한 그루, 하늘의 일부도 볼 수 없는 그늘진 공간이었다. 하나의 사무실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변호사가 쓰고, 나머지 공간을 네 명의 직원이 나누어 쓴다. 기분에 따라 접문을 열기도 닫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이 공간은 변호사에 의해 결정되는 공간임을 말해준다.

 

바틀비는 어떻게 변해가는가?

 

 처음에는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p.27) 문서 검증을 거부하고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p.30) 바틀비가 네 부를 끝냈다.(p.32), 오래 걸리는 또 다른 작업이 주어졌다.(p.37),

 

바틀비의 말을 모아본다.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선택을 했는 지를 알 수 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지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지금은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저는 여기 혼자 있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그 이유를 스스로 보지 못하세요?”(아니, 어째서? 더 이상 필사를 않겠다고? 에 대한 답이다. )

“저는 필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그 일을 하면 너무 많이 갇혀 있게 돼요. 저는 점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하지 않아요.”(포목상의 점원이 되면 어떠냐고 묻는 장면, 사무실 붙박이가 된 바틀비를 내보내기 위해 회유하는 변호사의 말에 대한 대답)

“다른 일을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상인을 대신하여 여행하며 수금해 보는 게 어떠냐는 말에)

“전혀 아닌데요, 거기엔 무언가 확정적인 게 없다는 생각이에요. 저는 고정적인 게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하지 않아요. ”(여행 동반자가 되면 어떠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내 집에 가서 같이 지내자는 물음에)

“나는 당신을 알아요. 당신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법원 구치소에 면회를 간 변호사에게 하는 말)

“나는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여긴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니라는 말에)

나는 오늘 식사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속에서 받지 않을 겁니다. 저녁식사에는 익숙하지 않으니까요.”(사식을 부탁하는 변호사의 말을 들은 취사담당의 말에)

 

 

 바틀비의 선택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작가가 마지막 문장으로 고른 것은 바로 성경책 욥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시련에 신을 원망하고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저주하는 장면에 나오는 욥기 3장 14절이다.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성경구절 욥기 3장 14절)

(*모사(謨士: 일을 이루기 위하여 꾀를 내는 데에 능한 사람)

 

 

<작품 후기>에서 작가는 바틀비가 사무실에 오기 전에 하던 일인 사서(死書) 우편물 계의 직원이었음을 밝히며 바틀비가 얼마나 힘들었을 지에 대해 언급한다. 사실 누구도 찾지 않는 죽은 이를 위한 우편물을 분류하고, 소각하는 일은 사람들로부터 잊힌 장면을 담당하는 쓸쓸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바틀비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 지를 알아보았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인간이 짊어진 삶의 무게와 산업사회의 이면에서 쓸모 있으면 선택되고, 쓸모 없으면 버려지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지를 짐작해 볼뿐이다. 쓸모를 결정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나인가? 너인가? 그도 아니면 보이지 않는 세력인가? 그조차 모른다면 멈춰야 한다. 쓸모의 선택.

 

 

생명의 심부름을 하는 그 편지들은 급히 죽음으로 치닫는다.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