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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수요일 2025-13주]비에도 지지 않고(미야자와 켄지) 본문

시 읽는 수요일(시 큐레이터)

[시 읽는 수요일 2025-13주]비에도 지지 않고(미야자와 켄지)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5. 3. 26. 17:12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 없이

절대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의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들으며 이해하고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작은 초가 오두막에 살면서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으면 찾아가 간호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으면 찾아가 볏단을 지어 나르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 두려워 말라 위로한다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일어나면 별거 아니니 그만 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란 소리 들으며

칭찬도 받지 못하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重版出來>라는 일본 드라마 시리즈가 있다. 유도 선수였지만 발목 부상으로 유도를 접고 만화 잡지 회사인 바이브스의 편집국에 취업하여 편집자가 된 쿠로사와. 그녀가 다니는 회사 흥도관(興都館)의 사장은 자신의 운을 모아 좋은 책을 한 사람이라도 더 읽게 하는 게 꿈이다.  심지어 복권 당첨에 운을 쓰면 자신의 회사의 책이 누군가에게 가서 도움을 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복권을 색종이 대신 손녀에게 자르도록 내어 준다. 바로 그 사장 쿠지 마사루가 그의 삶을 바로 세우게 한 시가 '비에도 지지 않고'다.  

 자본주의가 한국에 정착하기 이전인 1970~1990년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공책에 베껴 쓰기도 했고,  이러이러한 삶을 살겠다고 하면서 푸시킨의 시를 베끼기도 했다. 그 후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서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 된 지금은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게 자랑처럼 여기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 시를 읽으면 뭔가 잃어버렸던 꿈을 되찾는 기분이 든다.  적게 가졌어도 괜찮다. 재밌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일한 만큼 먹고 사니 괜찮다. 난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난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다. 별이 빛나는 시간은 다르니까.라는 말을 하는 철학자를 만난 기분이다. 

 

  다행인 건 요즘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언론과 정치인이 아파트를 사라고 부추겨도  더이상 사람들은 거기에 매력을 갖지 못한다.  너무 올라서 살 수도 없고, 그럴만한 가치를 두어야 할지 의문을 갖는다.  <스토너>라는 소설이 인기작이라고 한다. <스토너>는 평범하게 사는 인생도 소설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다들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별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우울해하지 말라고. 다들 그렇게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인생들을 그냥 그냥 살고 있다고 알게 된 것 같다. 

 

 잊고 지냈던 "~그런(이런이 아니다!)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는 말에 자신의 말을 한 줄 붙여 보세요.  

 오늘 나는

'저녁 먹고 산책길에 흥얼거리는 노래 한 소절 부르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라고 써 봤습니다. 

봄이 한꺼번에 몰아쳐서 오고 있습니다. 이 봄 평안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