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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수요일(시 큐레이터)

[시 읽는 수요일] 2025년 9주-국화 옆에서(서정주)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5. 2. 26. 23:36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서정주 시 <국화옆에서> 전문-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와 에밀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을 2월에 거의 동시에 읽었다. 에밀졸라가 제르베즈의 삶을 통해 화려하고 예쁘게 포장된 파리라는 도시의 외곽에서 살아가는 거리낄 것 없고, 더 나아질 가능성도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물었다. 존 윌리엄스는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영문학 교수로 살다가 너무나 평범하게 죽어간 인물, 스토너를 통해 또다시 묻는다. " 넌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했니?" 

  <스토너>의 번역자 김승욱은 스토너의 삶을 통째로 담은 이야기를 번역하고 난 후기에서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의 세 번째 구절을 변형하여 적었다. "세월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소설"이라고. 1965년 마치 자서전 같은 소설을 쓴 존 윌리엄스의 책은 미국에서 출간되었으나 유명한 책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50년이 지난 후 유럽에서 뒤늦게 유명해지면서 내가 읽게 되었다. 

 

   소설 속의 <스토너>는  자신이 원하는 삶은 살았으나 성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영문학을 선택하고 농부의 삶의 포기했으나 영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뛰어든 게 아니었다. 가르치다 보니 익숙해졌고, 기왕 하는 거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결혼도 즐겁지 않았다.  자녀 교육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진짜 사랑 같은 캐서린과의 사랑을 찾아 가정을 버리지도 못했다. 대학에서 종신 교수로 남으려 했으나 그마저도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병이 찾아왔고, 곁에 아무도 없을 때 삶을 마감하였다.  이런 스토리가 소설이 될 수 있나? 싶지만 '내 삶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내려놓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얀테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공동체의 이익과 유지를 개인의 성공 보다 우위에 두는 생활 규범이다. 그런 문화에서라면 <스토너>는 분명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사회적 성공을 중시하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뭐 이런 인생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니? 말이 돼?" 하면서 비난할 수도 있다.  아무튼, 저자는 소설의 말미에서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를 여러 번 묻는다.  스토너의 독백이지만 독자에게 묻는 말로 들린다.  술술 읽히는 책이지만 오래 기억하고, 오래 생각해야 할 책이다.  누군가는 <스토너>를 읽고 소설을 썼다. (문경민, <지켜야 할 세계>, 2024 혼불문학상 수상작)

 

  학창 시절에 뜻도 모르고 줄줄 외웠던 시구절이 이제 나이 오십을 넘어 읽어보니 국화 한 송이가 피기 위해 모든 일들이 일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헛되지 않았으며, 저절로 된 것이 없었고,  또 혼자서 된 것이 없었다는 걸 알게 한다.  이 밤에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옮겨 적으며 <스토너>를 기억하는 일도,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도 어느 날엔가  나에게 어떤 결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