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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신영복 <담론>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2. 2. 20. 16:10

 

  담론(談論)은 무엇인가? 무엇에 대한 이야기다.  고(故) 신영복 님의 책으로 부제는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다.  성공회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마지막 학기에 맡은 강의를 녹음하여 엮은 책이다. 2014년의 강의노트와 녹취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저자가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20년 20일간 무기징역으로 구속되어 있다가 1988년 출옥하고 이듬해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고전 강독과 정치경제사를 주로 강의하였고, 퇴임 후 석좌교수 시절에는 고전 인문학을 강의하였다. 이 글은 고전 인문학의 정수를 묶어놓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경제학 전공자가 고전인문학을 강의하는 것이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면 저자의 감옥생활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지내면서 세 권 이상은 소지할 수 없으니 책은 두꺼워야 했고, 읽기 어려운 책이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고전을 읽게 되었다.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한자 읽고 쓰기는 저자의 수감생활을 통해 붓글씨를 익히는 계기가 되었고, 스승으로부터 5년간 사사를 받아 글씨 쓰기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듣기만 하는 범생이들을 earhole  이라고 한다.  교실 안에서 교사가 하는 말을 귀로 듣고, 기억하기만 한다.  영역이 교실에 한정되어 있다.  그에 비해 날라리는 어떤가? 날라리는 맥락을 알고, 세 살의 이치를 깨닫고 있으며 범생이들에 비해 활동하는 영역과 범주가 크고, 이해의 폭도 넓은 셈이다. 

  저자는 교사인 부친을 둔 덕에 학교에서 태어나 학교에만 머문 자신이 감옥이라는 새로운 '인생대학'에서 삶을 새로 배웠다고 말한다. 교도소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들 사연이 있고, 세상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또,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세상에 떠밀려서 범죄자가 되어 버린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가 망설여졌다.  대체 뭐라고 써야 할까? 책으로만 세상을 읽는 내가 감옥에서 20년을 무기수로 지낸 저자의 글을 읽고 새로운 세상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았을 뿐 나름의 말을 뭐라고 쓸 수 있을까? 그래도 써야 한다면 책을 덮고 머리에 남은 글을 써 보기로 한 것이다. 

 

 이책은 2부로 나뉜다. 1부는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2부는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이다. 

1부는 주로 동양 고전, 논어, 맹자, 주역, 제자백가사상 등을 다루고 있다.  논어는 공자가 14년간 벼슬을 얻기 위해 주변의 나라를 떠돌다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친 내용을 엮은 책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仁(인)이다. 70넘은 아버지와 16세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장례업을 하는 일을 하던 공자가 만세의 목탁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배경은 14년간 거리에서 유랑생활을 통한 혁신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깨달음이 얼마나 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논어의 대화체 글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회자되는 사상이고, 중국의 한족이 자랑하는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이 되었다.  변화하는 시대에 어울리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제자백사사상 중에 법가사상을 주장한 한비자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2500년 전 법치 정치를 주장한 한비자가 살던 시대에도 인민(民 )으로 나뉘어 인(人)의 관리계급은 민(民)의 계급을 다스리기 위해 법치에 동의했을 뿐 관리, 학자들은 법에 적용을 받지 않았다는 내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요즘 기업의 오너, 국회의원, 대통령 후보들에 대한 법 집행은 일반인에 비해 한없이 관대하고 때로 국민의 분노를 유발하기도 한다.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법의 잣대가 세월을 두고도 변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깨닫게 한다. 

 

   논어, 맹자, 주역 등의 책에 대한 강의는 세계 정세 속의 한국을 읽는 혜안까지 얻게 한다.  2부는 감옥에서 알게 된 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감옥을 나온 후 세계여행을 통해 세계 역사의 흐름과 현재에 이르는 통찰까지를 담고 있다. 왜 한국과 북한이 통일하려는 염원이 있어도 통일을 하지 못하는가는 미국이 세계정세를 휘두르는 법칙에 열쇠가 있었다. 중소국에 다소간의 개입의 여지를 열어두고, 러시아와 중국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는 것이 미국의 전략이라는 점이다.  요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의 전쟁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시점에서 저자의 눈으로 읽는 세계정세는 사뭇 다르게 읽힌다. 

 

 유랑생활을 할 때 공자가 며칠 째 밥을 먹지 못한 상태에서 거문고를 켜고 있자 제자가 물었다고 한다.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라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지는 법이지."라는 말에 제자들이 일어나 거문고 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다고 한다.  

 또 한 장면이 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날 비를 피해 공자 일행은 빈 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 밤에 공자와 제자들은 마루에 앉아 천둥 번개가 치는 하늘을 내다보면서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밤, 공자와 제자들은 거기서 무엇을 읽었을까?

배고픔과 유리걸식,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들녘의 찰라의 순간들이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한 장면에 불과함을 읽고 있지는 않았을까?

 

   나는 이 책에서 공자를 새롭게 발견했다.  이전에 논어, 맹자는 이 땅에 조선시대라는 유가(儒家) 사상으로 뿌리내려 결국 외세의 침략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한 쇄국정책으로만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36년간의 참혹한 시절을 겪어야 했던 낡은 사상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그런 사상이 아니었다.  14년간의 유리 걸식과 방랑이 공자의 사상을 개방적이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상으로 만들었고, 그 사상이 오늘날까지도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점이다. 고전은 오래된 미래라는 사실이다. 

 

   첫번째 읽을 때는 5년 전쯤이었을까? 지금 읽고 다음에 다시 읽으면 그 깊이가 다르게 읽힐 것이다.  저자가 삶의 이유를 공부라고 들었는데 나 또한 공부로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가는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나의 깨달음이 영글어 누군가에게 베풀어질 수 있을 때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직 너무 성급한 생각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