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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수요일(시 큐레이터)

詩 <꽃 지는 날엔>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1. 10. 22. 09:25

2021 가을, 캐나다 몬트리올의 가을 사진을 선물받았다. 우리보다 계절을 앞서가는 모양이다.

 

 

꽃 지는 날엔

 

꽃 피는 날엔

누구와도 다투지 않기로 한다. 

 

꽃 지는 날엔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연두색 잎이 초록색으로 바뀔 땐

낡은 구두로

바다 위 돛단배와 물고기를 만든다.

 

어디선가 기차 지나가는 소리 들리면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고

 

 저녁 종소리 들릴 듯 말 듯 기억이

자꾸 고개를 돌리면

내 잘못을 용서한다.  

 

혀로 망친 날은 용서하지 않는다

일주일이나 보름동안 별빛 보며

세시간 이상씩 걸어도 부족하다

 

아무 것도 믿지 않아서 출구가 없었던 날들 

 

이십대가 다 가도록 아름답지 못했고

아름답기도 전에 이십대가 다 갔으니 

 

서른과 마흔을 보낼수록 점점 더 산뜻해져야 한다. 

 

그런 봄날의 믿음

차츰과 주춤의 간격들

 

가방 무거운 날엔 입술도 무거워야 한다.

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다

 

눈물을 잊으면 부족한 게 점점 많아져

얼굴이 곤두서네 

 

비오는 날에도

비 오지 않는 날에도

아무와도 다투지 않기로 하지만 

 

꽃 피는 날에도

꽃 지는 날에도 

후회가 많아서 운다

 

세상 살면서 가장 쓸모있는 건

뉘우침 뿐이라고 

 

꽃 피는 날에도 꽃 지는 날에도

 

 

                      - 김경미, 시 전문-

 

 

  꽃이 피고 지고 가을이 깊어 가는 날 비가 온다.  입이 무겁고,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는 화장실 청소를 하면 제격이다.  묵은 때를 닦고 또 닦으며 지나간 날을 지운다.  줄눈마다 쌓인 묵은 때는 아무리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다 바라보면 천장도 얼룩덜룩 하다. 등받이 없는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걸레로 천장도 닦는다.  내가 서서 있던 바닥보다 머리 위가 더 더러워 보인다.  환풍기 뚜껑을 열고,  거기 솜뭉치처럼 뭉쳐서 환풍기 날개에 엉겨붙은 누더기 같은 뉘우침과 후회와 원망을 털어낸다. 

  가을이 깊어지면 입에서 단내가 난다.  이미 오래 전에 져버린 계수나무잎에서 나던 단내가 내 입에서도 난다.  입을 열면 자꾸만 뱀, 개구리가 튀어나온다는 옛말 이야기처럼 나도 입을 열면 거친 말이 나와서 입을 무겁게 했다. 하루종일 입을 닫고 있으니 단내가 난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밤에 묵은 때를 벗겨낸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들어 앉아 단내나는 입을 연다. 때로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