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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 <병원> 본문

읽히는 시

윤동주 시 <병원>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4. 6. 12. 17:28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른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다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윤동주의 시 <병원>-전문

 

2024년 6월 18일을 전국 개업의들이 동참한 파업을 감행하겠다고 의사협회가 선언했다.  그날은 동네 병원부터 대형 병원까지 모두 문을 닫아걸고 파업에 동참한다고 하니 아프더라도 그날은 피해서 아프라는 말인가 싶다.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따른 후폭풍이 여기까지 다다랐다.  이미 오래전에 인턴, 레지던트 하던 전공의들은 대형 병원을 그만두고 학교에도 돌아가지 않고 있어서 휴업 상태다.  혹자는 택배 노동을 한다고 한다.   한겨레 신문에 실린 신영전교수의 칼럼 <의사는 아픈 이와 함께 할 때 가장 힘이 세다…그곳으로 오라>(2024.6.10)을 읽고 나니 그들의 명분이 무엇이었는지 갈피를 잃어버린 건 아닌지, 혹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다. 

 

 밥 그릇 싸움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파업은 전문의 선후배 사이에서도 동조하지 않으면 왕따가 되는 그들만의 세상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대도시는 그나마 이 병원 아니면 저 병원을 선택해도 되지만 지금 작은 시군의 보건의료원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근무하고 있는 전문의들까지도 대형병원으로 차출하여 쓰는 바람에 더욱더 의사를 만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당장 벌에 쏘여 달려가도 해독제 처방할 의사가 없으니 발을 동동 구르다가 민간요법이라도 써볼 수밖에.  미개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도 저도 못하면 아무리 인터넷이 발전한 세상이라도 목숨이 위태로워서 휘하는 어쩔 수 없는 조치다. 

 

 크로닌의 소설 <성채>를 읽어보면 왜 의사들이 비타민 주사를 권하고,  성형외과로 몰리는 지 이유를 알 수 있다.  자본의 매력으로 의사들을 매수하고 그 하수인이 되고 마는 의사들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  이미 법마저도 자본의 그늘에 가려져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자본가들의 편을 들어주는 세상에서 의사들마저 자본의 그늘에서 사람을 가려가며 치료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은 늘 옳은 방향으로 진화되어 오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사람들의 양심이 이기는 세상일 거라고 믿고 싶다.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해서  의사들이 그동안 누려온 혜택이 줄어들 수는 있겠으나 그걸 반대하는 게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책임까지는 못 지겠다는 거 아닌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 보기에 그렇게만 보인다. 그동안 연명치료,  비타민 주사, 과잉 진료,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 회피 등의 성채로 가려졌던 의사들의 세상을 당신들만 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이미 전 국민이 그 속을 다 알고 있었다.  전문의 복귀가 되지 않는다 해도 세상은 다시 꾸려질 것이고 새로운 방향을 찾을 것이다.  다만 그나마 작은 실낱같은 희망과 사람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직업으로서의 사명감과 보람을 직업에서 찾는다면 이번 파업은 실행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전문의들은 있어야 할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거기 신영전교수와 같이 묵묵히 현장을 지키는 분들이 아직 돌아온 전문의들을 반길 것이다. "잘 왔다.  괜찮다. 괜찮아. "하면서 등을 두드려 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 <병원>을 읽으면서도 시의 내용보다는 현실 속의 병원의 문제가 자꾸 떠올랐다.  나는 병원을 아주 싫어한다.  거대한 흰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 위압감으로 주눅들고 흰 가운 입은 의사 앞에 서면 혈압이 높게 나온다.  차가운 기계를 대할 때는 또 어떤가? 환절기만 되면 손이 한 꺼풀을 벗어야 한다. 마치 뱀 허물처럼.  의사의 말은 원인을 모르니 연고를 바르든지 평생 아는 병으로 여기고 사는 방법밖에는 없단다. 일명 '상세 불명의 한포진'이다.  의사가 아는 병보다 모르는 병이 더 많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병원에서 어떤 연유로 병원에 입원을 했을까? 그는 어떤 의사를 만났을까? 그 역시 의사가 그의 병을 알지 못해 답답해했다.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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