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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 시

신경림 <농무(農舞)>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4. 6. 8. 12:54

  농무(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때를 흔들거나

-1985. 실천문학사 농민시선집 중 신경림의 시 중에서 <농무> 전문-

 

  얼마 전 신경림 시인이 자연으로 돌아갔다.  신경림 시인의 시 <농무>는 대표작이다.  이사 몇 번 다니는 동안 짐스러워도 버리지 않았던 백 여권의 시집 중에 신경림 시인의 시가 있어서 들춰본다.  농무는 농악을 연주하면서 춤을 추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꽹과리, 징, 북, 장구, 소고 등의 악기를 들고 농사일이 바쁠 때는 노동요를 연주하고, 추수하고 나서는 풍년을 축하하는 추수감사를 할 때도  농악은 필수다.  농악은 악단에 참여한 사람도 신나지만 구경하는 사람도 신이 난다. 그리고 미리부터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울려대는 연주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함께 어울려 즐기기에 충분한 시간을 만들어 낸다.  어깨춤을 추고, 어깨를 들썩이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 어른들도 있고. 

 농사일은 힘들고 비료값도 나오지 않는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그래서 그 분통 나는 현실을 벗어나고자 꽹과리를 들고, 북을 들고 나와 신명으로 바꾼다. 삶의 고달픔을 신명으로 바꾸는 데는 악기연주만큼 좋은 게 많지 않다.  온몸을 흔들고 북을 치고 어깨춤을 추면서 점점 한 덩이가 되어 땀을 흘리다 보면 현실을 넘어 마당 한가운데에 거대한 사람꽃을 피워낸다.  덩덩 덩더꿍 덩따쿵따 덩따 쿵따 덩덕 쿵쿵~쿵~ 쿵 ~쿵~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된다. 

 

 신경림시인의 <농무>를 통해 잊었던 세월의 한 편의 기억을 발견한다. 치자빛의 노란 전구가 매달린 농촌의 풍경이 아른하다.  비 오는 토요일의 여유에 귀한 시 한 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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