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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본문
"왜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불편한가?"
2년 전쯤 이 영화를 보고 왜 제목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가?에 대해 스스로 물었으나 대답할 수 없었다. 다시 넷플릭스에 올라 온 영화를 보고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답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악마의 화신처럼 그려진 안톤 쉬거의 모습은 대다수가 가진 총으로는 대항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산소통을 개조한 무기, 총을 개조한 또다른 무기등)를 가졌으며 무표정한 얼굴에 읍습한 기운으로 상대방(특히 노인들)을 무력화시키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미지로 묘사된다. 노인을 무기력한 존재로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왜 제목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2007)인가? 누구의 작품인가? 궁금해졌다. 나무위키에서 답을 찾았다.
동명소설은 코맥 매카시(1933-)라는 미국의 작가가 쓴 소설이고 그는 서부의 세익스피어라고 불리며 남부문학으로 분류하기도 하는 작가다. 주된 배경을 미국 남부의 멕시코와의 국경지대를 그렸다. 영화로 만든 사람은 조엘 코엔과 에단 코엘 형제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에드 톰 벨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안관으로 지내왔고, 그가 여전히 말을 타고 지역을 순찰하는 등 이전의 경험과 습관에 익숙한 노인임을 보여준다. 그는 은퇴를 앞둔 노장 보안관이다.
늙은 보안관 에드 톰 벨은 탄피를 보고 총의 종류를 알아맞히고, 오래된 지혜를 가진 현명한 생각의 소유자이지만 혼돈과 재앙의 화신처럼 그려지는 안톤 쉬거의 뒤만 간신히 쫓을 뿐이다. 양심적이고, 이성적이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은퇴하는 무능한 모습으로 비쳐진다.
즉, 노인(경험 많은 이성을 가진)세대가 예측하고 대처할만한 세상이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동전의 양면 중 한 면을 선택하게 하여 죽음을 정당화하는 등 이전 세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묻지마 범죄가 매일 뉴스를 통해 쏟아지는 것이 현실임을 접하지만 대처할 수 없는 세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은 아일랜드 출신의 윌리암 버틀러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의 첫 구절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일본은 '노 컨트리'(ノーカントリー), 중국은 '늙은이가 기댈 곳은 없다(老无所依)', 대만은 '위험한 길에는 가까이 가지 말라'(險路勿近), 홍콩은 '이백만불이 목숨을 빼앗는 뜻밖의 사건'(二百萬奪命奇案), 베트남은 '숨을 곳은 없다'(Không chốn dung thân) 등이다. -나무위키에서 발췌-
아래의 시는 예이츠가 61세가 되는 해에 늙음에 대한 슬픔을 안고 쓴 시라고 한다. 영시와 번역본은 아래의 출처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노년에 이른 시인의 무력감과 소외감을 표현하면서 유한한 육체의 쾌락을 벗어나 보다 심원한 영혼의 노래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Sailing to Byzantium
By William Butler Yeats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The young
In one another's arms, birds in the trees,
- Those dying generations - at their song,
The salmon-falls, the mackerel-crowded seas,
Fish, flesh, or fowl, commend all summer long
Whatever is begotten, born, and dies.
Caught in that sensual music all neglect
Monuments of unageing intellect.
An aged man is but a paltry thing,
A tattered coat upon a stick, unless
Soul clap its hands and sing, and louder sing
For every tatter in its mortal dress,
Nor is there singing school but studying
Monuments of its own magnificence;
And therefore I have sailed the seas and come
To the holy city of Byzantium.
O sages standing in God's holy fire
As in the gold mosaic of a wall,
Come from the holy fire, perne in a gyre,
And be the singing-masters of my soul.
Consume my heart away; sick with desire
And fastened to a dying animal
It knows not what it is; and gather me
Into the artifice of eternity.
Once out of nature I shall never take
My bodily form from any natural thing,
But such a form as Grecian goldsmiths make
Of hammered gold and gold enamelling
To keep a drowsy Emperor awake;
Or set upon a golden bough to sing
To lords and ladies of Byzantium
Of what is past, or passing, or to come.
비잔틴으로의 항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저기는 늙은이를 위한 나라가 아니야.
껴안고 있는 젊은이들, 나무 위 새들,
- 죽어가는 세대들 - 은 노래 부르고,
연어가 뛰는 폭포, 고등어 가득한 바다,
물고기, 짐승, 새들은 여름 내내 찬미하네
잉태되고, 태어나고, 죽는 어떤 것이든.
관능적인 음악에 사로잡혀,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모두 경시하네.
늙은이는 하찮은 존재,
영혼이 손뼉 치고 노래하지 않는다면
지팡이 위에 걸쳐진 낡은 코트일 뿐,
육신의 옷이 해져 갈수록 더 크게 노래하네.
영혼을 위한 노래를 가르치는 학교는 없고,
자신의 장엄한 기념비를 공부하여야 하네.
그래서 난 바다를 항해하여
신성한 도시 비잔티움으로 왔네.
황금 모자이크 벽에 새겨져 있는,
오, 신의 성스러운 불길 속에 서 있는 현자들이여,
신성한 불길에서 선회하며 내려와,
내 영혼에 노래를 가르쳐 주소서.
내 심장을 태워버리소서,
죽어가는 짐승에 붙어 있는, 욕망으로 병든
그 심장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니.
그리고 날 영원의 작품 속으로 이끄소서.
일단 자연에서 벗어나면, 난 결코 다시는
자연에서 내 육체적 형상을 취하지 않으리.
오직 그리스의 금세공인들이 다듬은 금과
금 법랑으로 만든 형상을 취하리라.
졸음에 겨운 황제를 깨우기 위해,
또는 황금 가지 위에 앉아
비잔티움의 영주와 귀부인들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노래하기 위해.
[출처]https://blog.naver.com/yoonphy/222290213362
그럼, 노인이 기댈 곳은 정말 없는가?
오래전 한 생물학자에게 늙은 개미는 어떻게 살아가냐 물은 적이 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이가 들어 껍질이 단단해진 늙은 개미는 젊은 개미들의 싸움에서 제일 앞줄에 선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낡은 기성세대도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비책이다.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올 때 그 행진의 가장 앞에 서면 된다. 그리고 늘 이런 주문을 외우면 된다. ”청춘의 피는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의 새가 운다."
--신영전칼럼(2021.4.27. 한겨레신문)에서 발췌
맥락이 다를 수 있으나 노인이 되어 기댈 곳을 찾기 보다 후세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지를 고민하고 옳고, 좋은 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그저 맥없이 몰려오는 악의 화신처럼 그려진 젊은 세대(그것이 범죄일지라도)에게 고스란히 이전의 역사와 문화를 내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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