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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 시> 분갈이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2. 9. 19. 19:27

   

         분갈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가지들

자꾸만 작아져 가던

당신의 팔과 다리를 닮았다. 

 

분갈이 하기 위해 나무를 뽑았다

둥근 화분 모양으로 가늘게

갇혀있던 뿌리들

 

어떤 화분으로도 옮겨 심지 못했다

당신을 풍장 하고 돌아오는 날처럼 기도했다

 

바람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라고

갇혀 지내지 말라고

 

-김예리사 -<분갈이> 詩 전문

 

'한 곳에서 20년 넘게 사는 거 지겹지 않으세요?'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민 간 지인의 물음에 생각해 보았다. 20년 동안 한 곳에 사는 게 지겨울 틈이 없었다. 사느라 바빴다. 돌이켜 보니 월화수목금요일은 직장에 출근하여 8시간을 지내고, 나머지 시간은 직장의 시간을 위해 재충전하느라 보냈다. 토일요일은 다음 한 주를 위한 충전의 시간으로 대형마트에서 줄을 서서 카트에 한 가득씩 먹거리와 생활용품을 사고, 넘쳐나는 음식물은 쓰레기로 버렸다. 때가 되면 여름 휴가도 가고, 남들이 가는 해외 여행도 다녀왔다. 그러다 보니 20년이 훌쩍 지나 아이들은 청년이 되고, 나는 중년이 되었다. 

 

 시인은 분갈이를 하려고 빼낸 뿌리를 다른 화분에 옮겨심지 않았다. 그러면 식물은 뿌리를 내리지 못해 죽고 말 것이다. 화분 안에서 차곡차곡 뿌리를 접었던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마치 식물의 치부처럼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부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식물의 역사다.  특히 난 화분을 분갈이 하려고 보면 말라버린 가짜 뿌리가 진짜 뿌리 역할을 하는 부분보다 더 길다. 그럴 땐 하는 수 없다. 가짜 뿌리는 모두 잘라내고 진짜 뿌리를 가려내 살려야 한다. 

  또, 이렇게 말라가는 팔다리 모양으로 더이상 뿌리에 힘이 없는 화분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심어보면 제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뻗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식물의 제 색을 찾고, 잎도 무성해진다. 

 

 사는 일도 분갈이와 다를 바 없다.  어느날 문득, 가짜 뿌리처럼 주변에 쌓인 게 많으면 가짜 뿌리는 싹 잘라내고 진짜 뿌리만 추슬러서 다시 분갈이하는 심정으로 사는 거다.  주기적으로 분갈이를 하지 않으면 가짜 뿌리가 너무 많아서 진짜 뿌리가 내릴 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니 자주 자주 분갈이를 해야 한다.  생각도 쌓이면 짐이 될 뿐이다.  그저 바람에 날리듯이 갇히지 않는 생각이 사는 비결이다.  바람처럼 가볍게 오늘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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