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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정희진처럼 읽기 본문
며칠 전 지하철을 탈 일이 있었다. 남의 이야기라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옆에 나란히 앉은 두 청년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나 다음 달에 사진 찍기로 했어. 요즘 계속 PT(퍼스널 헬스 트레이너) 받아. "
"너 요즘 다이어트 하는 거야? 오늘 모임에서 음식은 먹을 수 있어?"
요즘은 남자도 결혼식 앞두고 다이어트를 하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니 아직 20대로 보인다. 결혼식은 아닌 것 같다고 짐작한다.
"세상에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내 몸밖에 없잖아........"
세상에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몸 밖에 없다니. 저럴 수가? 자신의 몸을 학대 수준으로 몰아붙여서 10킬로그램 이상 감량을 한 후에 바디 프로필 사진을 찍어서 공유하는 게 트렌드인지 유명 연예인이 시도해서 꽤 반응이 높았던 게 지난 1월이었다. 아마도 이 청년도 바디 프로필을 찍기 위해서 다이어트 중이라는 말로 해석된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볼 때 그의 선택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같은 저자의 책을 여러 권 이어서 읽거나 1주일, 2주일 계속 같은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의 경험상 주로 무겁고, 어두워서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이 책 읽기를 이제 끝내야 될 때가 왔다.'라고 판단될 때다. 이전에는 그런 생각에서 그쳤다면 이제는 책을 손에서 놓기 전에 서평을 쓸 때가 되었구나. 나의 생각이 무르익어서 이제 옹달샘의 물을 좀 길어 내도 되겠다고 여기고서 컴퓨터 화면에 그 책을 띄운다.
<정희진처럼 읽기> 이 책은 독후감이다. 저자는 "독서는 수많은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고, 독후감은 다르게 읽기와 자기 탐구다."라고 말한다. 읽기 전과 읽은 후가 변화가 있어야 하며 그 변화에 대해 쓰는 것이 독후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여성학을 전공한 박사로 모든 영역을 볼 때 여성학의 관점에서 들여다 보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그의 글은 약자로서 사회를 살아가는 백인, 남성이 아닌 사람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성의 입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글을 쓴다. 때로 불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읽는 이를 자존심 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당신이 살아온 삶의 진짜 모습은 이거였어!'라고 단정 지어 말해 줌으로써 어설피 알았던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게도 한다.
저자가 내린 공부에 대한 정의는 내가 코로나 이후 블로그와 서평을 쓰면서 느끼는 공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대변해 주었다. 독서와 서평 쓰기 과정에서 나의 실력이 늘지 않음에 갑갑함을 느끼고, 나의 무지에 속절없이 절망하는 마음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렇다. 저자의 말대로 나는 지금 나의 한계와 맞서는 중이다. 나를 발견하는 중이다.
사유는 힘든 일이다.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 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장승수 편, 278쪽
한편으로 저자는 사회 전반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놀랍도록 정확하게 해석을 한다. 물론 가난한 사람, 서민의 입장에서다.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가에 대한 불만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의문일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겪고, 다시 미국의 원조와 미군의 지원을 받는 시대를 겪으면서 조선 시대와는 다른 사회이고 신분 계층도 없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은 무엇일까?
나도 궁금하던 차에 그 출발점을 헌법에서 찾았다. 헌법 제3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 1962년 개정된 이후 우리나라에 능력주의가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다고 한다. 벌써 40년 전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수학능력시험에 발목을 잡혔고, 공교육이 힘을 못 쓰고 사교육이 판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에서 시선을 멈춘다. '어떤 능력을 가져야 하며, 어떻게 균등하게 적용된다는 말인가?' 교육, 의료, 정치, 문화, 사회 전반에 능력주의와 시장 우선의 신자유주의가 뿌리내린 세월이 의외로 길었고, 그 뿌리가 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이 계속 발생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자는 사회 현상에 대해 명백하게 지적한다.
자본주의와 의료 기술의 발달은 가난한 사람에겐 모순이다. 일하는 시간은 짧아졌고 평균 수명은 길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에 맞는 라이프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있어 보이는 옷, 품위 있는 취미, 식생활……. 결국 돈은 이전 세대, 부모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상 이런 세습 사회가 있었던가. 타인의 시선은 사회적 연령이자 곧 나의 시선이다. 자신에게는 “이 나이가 되도록”, 타인에게는 “저 나이가 되도록”. 상호 혐오 사회다.- 타인의 시선, 94쪽
발광에 가까운 저항을 하면서도 나는 알고 있다. 체념이 덜 외롭다는 사실을. 삶은 생물학적인 것만도 아니고, 사회학인 것만도 아니다. 두 가지는 서로를 반영하면서 저항과 체념을 반복한다. 계급과 성병을 따라 나이에 대한 시선은 매우 차별적이지만 우리는 모두 죽는다. 평등한 죽음이나마 평등하게 누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타인의 시선
평화 혹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얼룩진’ 옷을 벗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외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람들은 소통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행복보다 괴로움이 안전하다. 행복은 지켜야 하는, 피곤한 것이다.-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87쪽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저자는 자본주의가 지구를 삼켜버리고 인간은 인간성 밖으로 추방된 시대의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다. 돈 앞의 인간, 특히 계급 심리 분석이 뛰어나다. 지성과 입장(당파성)을 겸미한 자의 글쓰기란 이런 것이다. 문장은 빼어나고 정치적 입장은 올바르다. 학문 간 경계 지키기에 문지기(gate keeper) 역할을 하면서 앎에 겁먹은 ’ 지식인‘에게 다학제 연구의 모범이 되는 책이다.-공포는 존재하였기 '때문에' 지금 존재한다, 108쪽
그래서 나는 멍하니 앉아서 TV 보거나 영화를 본다. 생각하는 일은 참 피곤한 일이다. 월급 노동자의 자기 생각 유지는 쉽지 않다. 지속적으로 매뉴얼과 시스템화를 강요하는 사회에 적응하다 보면 '자기 생각'과 싸워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생활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자신의 말로 재정의한다. 나는 주변의 일을 자신의 언어로 재정의하는 일, 이것이 공부의 결과라고 본다. 나의 정의에 의하면 저자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 결과를 거미줄처럼 뽑아내는 공부에 성실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은 제때,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할 때 몸에 남아 병이 된다. 미련과 후회, 그리움이 지나치면 ‘떠나보내라’고들 한다. 사실 그러고 말 것도 없다. 그들은 혼자 간다. 존재하지도 않는다. 떠났으니까.-아무 인사도 없이, 68쪽
대개 남성 지식인이 사고를 친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간 누려온 줄도 모르고 맘껏 누려 왔던 ’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것이다. 한 번쯤 평소 좋게 생각했던 지식인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부적절한 ‘ 발언을 했을 때, 누구나 사람 보는 자기 안목을 탓하며 실망한다. 그들의 인격은 고사하고 지성이 의심스럽다. 부지런한 이들은 크고 작은 ’ 규탄대회‘를 역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깨달아 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할 때 ’ 걸어 다니는 재앙‘이 따로 없다.
특히, 남성은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그나마 대안은 24시간 긴장, 타인 존중, 말 줄이기 경청, 자기 몸을 작게 하기, 중단 없는 주제 파악……나부터. -마음 솟는 대로 지껄이는, 138쪽
영국 여왕과 몇몇의 여성들을 제외하고 모든 여성들은 저녁에 무얼 먹을까? 내일 아침 메뉴는 어떻게 할까?를 생각한다. 퇴근길에는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시장(마트)에 들어서 양손에 뭔가를 들고 집으로 간다. 직장 여성들에게 집은 제2의 일터이다. 퇴근길 장보기가 싫을 때가 있었어요? 여성들은 혹시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살까 힘들었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여성들이 지나친 규범에 얽매어 있음을 말해 준다. 저자는 바로 이런 여성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말해 준다. 어쩌면 너무 놀랍도록 새로운 시선으로 지적한다. 우리 사회가 남성 위주의 사회요, 남성 중심의 문화라는 것을 말해 준다.
남성에게 집은 쉼터지만 여성에게는 노동의 공간이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규범이다. 그래서 남성은 혼자일 때 더 외롭고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들은 독립, 자립, 씩씩함 같은 ’ 우월한 ‘ 남성성에 대한 통념과 다르게, 실제로는 같이 놀아줄 이성을 필요로 한다. 여주인이 ’ 호스티스‘로 둔갑하고 ’ 위안부‘, ’ 접대부‘는 남성 문화를 상징한다.-2교대, 141쪽
저자는 내가 읽었던 책 <필경사 바틀비> 현상의 원인을 나와 같은 시선으로 찾고 있다. 자본주의에 적응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강요당하고, '역량 강화'를 주문받는다. 직장인들은 '역량 강화 연수'를 수시로 받는다. 옵션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다. 계속 채용 옵션은 매년 늘어나 일 년에도 수십 가지의 '연수'를 받고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프로그램의 사양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로봇처럼 업그레이드되도록 강요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하면 된다'는 의지적 인간의 탄생이었다. 작금의 자본주의는 의지의 소유조차 극소수로 제한한다. '나머지들'은 자기 계발의 늪에 빠지고 좀 더 지혜로운 이들은 포기를 선택한다. 학생들은 온 힘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학력 저하는 '노력의 성과'다. 아이들에게 '귀차니즘'은 문제가 아니라 대안이다. 그들은 신인류가 아니라 폐허 적응에 성공한 것이다. 룸펜, 의지박약자, 잉여는 구제 대상이 아니라 파국의 주체다. -자유는 고립 이데올로기다, 296쪽
저자의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저자가 밝힌 대로 관심 있는 주제(권력, 언어, 지식, 고통, 관계, 몸)와 관련된 책을 읽되 예상 가능한 책이나 가독성 좋은 책은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책에서 독후감으로 제시한 책 중 아는 책 보다 처음 들어본 제목이 더 많았다. 내용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곳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의 여러 부분을 필사하였다. 저자의 끊임없는 연구와 '생각'의 결과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만 읽는 이의 수준을 고려하여 책을 써 주기를 바란다. 책을 쓰는 목적이 읽는 이가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독자의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촌철살인의 언어들이 자극적이고, 때로 너무 기분에 좌우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없지 않다. 나는 저자의 글을 더 많이 이해하고 싶은 독자이다. 저자의 언어가 영어쯤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언어가 아닌 줄줄 읽히는 언어처럼 편한 언어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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