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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글쓰기-물.흙.불.바람

팔할이 바람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0. 10. 19. 09:48

현재의 나를 있게 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물음이다.

답을 찾다가 떠오른 시

서정주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다.

 

자화상

        서정주(1937. 가을)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이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는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도

몇 방물의 피라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화사집, 남만서고, 1941>

 

내가 찾고자 했던 단어는 <팔할이 바람>이었다.

바람은 자연의 섭리를 대표한다. 환경을 말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의도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고

내 주변의 환경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이다.

내가 만난 환경이 나를 현재, 오늘의 나로 만들어 놓았으나 나는 그것이 온전이 나의 노력이라고 생각해서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 자만했고, 때로는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바람이 나를 만들었으니 나는 그저 그 바람을 맞으며 살아낼 뿐이었다.

어떤 선택도 나의 의지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의해, 바람의 방향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니

바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억새에 이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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