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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 시

차를 마시기 적당한 시간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3. 3. 29. 22:02

차를 마시기 적당한 시간

 

마음과 손이 다 같이 한가할 때

시를 읽고 피곤을 느꼈을 때

생각이 어수선할 때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노래가 끝났을 때

휴일에 집에서 쉬고 있을 때

금(琴)을 뜯고 그림을 바라볼 때

한밤중에 이야기를 나눌 때

창문이 밝아 책상을 향하고 앉을 때

잘생긴 벗이나 날씬한 애첩이 곁에 있을 때

벗들을 방문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하늘이 맑고 산들바람이 불 때

가볍게 소나기가 내리는 날

조그만 나무다리 아래 뜬 곱게 색칠한 배 안

높다란 참대밭 속

여름날 연꽃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누각 위

조그만 서재에서 향(香)을 비우면서

연회가 끝나고 손님이 돌아간 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사람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조용한 절 안에서

명천기암(明泉奇岩)이 가까운 곳에서

 

-차에 관한 평론서 <다소>에서 나온 내용-린위탕의 <생활의 발견>189쪽 인용

 

  가장 좋은 차에서 바랄 수 있는 향기는 갓난애의 살결에서 풍기는 듯한 델리키트(delicate, 연약한) 향기이다. -린위탕(임어당)의 <생활의 발견>188p

 

  린위탕이 언급한 차(茶) 마시기 적당한 때를 보면서 나의 차 마시는 시간을 가늠해 본다.  습관처럼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사무실에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아침 회의를 시작한다.  그리곤 한 바퀴 돌아보고 다들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9시가 되면 나의 일과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컴퓨터에 쌓인 무게 없는 일들을 무게 있게 채우고,  버려야 할 일은 버리기도 하면서 담벼락 같은 화면을 내내 쳐다본다.  그러다 생각나면 커피 한 모금 마시고,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눈을 시원하게 하려고 바깥바람을 쐰다.  뒷마당에 매화 세 그루가 있는데 그중 나중 핀 꽃이 한창이다.  그 곁에만 있어도 매화향이 짙다.  하릴없이 그 아래를 왔다 갔다 하면서 떠나질 못한다.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그 향기가 커피 향과는 다른 향긋함으로 머리를 식힌다.  오전 10시 30분이 직장인들이 가장 몰입하기 좋은 시간이라고 한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간다.  담벼락 같은 컴퓨터는 버티고 서서 암호를 요구한다.  암호는 하나, 둘, 셋! 적어도 세 번은 눌러야 접근을 허가한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 갇혀버린 사람들이 담벼락과 씨름 중이다. 예전 어떤 어름이 술을 마시고 도깨비와 씨름을 한 판 하다가 깨어보니 빗자루와 씨름하고 있더란다.  우리가 씨름하고 있는 담벼락은 그저 담벼락일까? 아니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일까? 고민이 생기면 고민이 끝날 때까지 하고 그래도 고민이 있을 때는 차 한 잔! 마시면 새 세상이 열린다.  이제 고민은 차 한 모금과 함께 사라진다. 

免面墻...免 면할 면, 面 낯 면, 墻 담 장, 아는 것이 부족해 눈앞의 담벼락에 갇힌 듯한 마음이 바로 면장(面墻)이고 배움에 힘써 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면면장(免面墻)이다.  배움에 힘써서 면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차 한 잔! 막힐 때도 차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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