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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아버지의 해방일지 본문
<나의 해방 일지>라는 드라마가 있다. 2022년 봄에 '나를 추앙해요, 사랑으로는 부족해요'라는 말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다. 이 책은 <아버지의 해방 일지>다. 한 책이 유명세를 타면 비슷한 제목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 책은 <해방 일지>의 시리즈인 셈인가 싶다. 제목은 다소 신선감이 떨어지지만 기류를 탄 셈이다. 내용은 제목의 유명세와 달리 한국 역사의 아픈 기억인 빨갱이, 빨치산으로 산 한 남자의 이야기다. 아니, 한 가족이 겪은 한국의 현대사다.
저자는 구례에서 태어났다. 구례는 지리산 아래에 자리잡은 도시다. 지리산은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 소탕작전이 가장 마지막까지 치열했던 곳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모진 세월을 살아내야 했다. 마을의 누구는 공산당, 누구는 일본을 도와 일을 했고, 또 누구는 군인이 되어 서로의 세상이 바뀔 때마다 처지가 바뀌는 세상을 살았다. 저자는 구례에서 태어나 이런 역사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저서는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1995년 <고욤나무>,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등의 작품이 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례를 치르는 동안 아버지의 지인들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재조명하는 딸의 이야기다.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혀 병원에 실려간 아버지는 그 길로 죽음에 이르렀다. 공산주의가 옳다고 선택한 응분의 대가를 사는 내내 치러야 했다. 연좌제를 이유로 아들, 손자는 물론이고 사촌조차도 공무원이 될 수 없었다. 전향을 하지 않으면 감옥에서 40년을 지내야 했다. 경찰서의 형사과 형사가 바뀔 때마다 인수인계의 대상이었고, 불시에 감옥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전기고문으로 몸의 중요한 기능을 상실했다. 그런 아버지가 <새농민> 책에 나오는 대로 농사짓는 농부가 되었다. 그리고 고향에서 빨갱이로 손가락질받으면서도 평생을 살아냈다. 다 같이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사회주의의 이념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살았다. 그런 사실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야 마주하게 되었고, 죽은 아버지는 그가 살린 많은 사람들을 통해 되살아났다.
"고봐라. 내가 뭐랬냐? 믿으랬제?"
"긍게 사램이제."
"오죽허믄 나헌티 전화를 했겄어, 이 밤중에!"
"자네 혼차 잘 묵고 잘 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61P)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44P)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102P )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먼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137P)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게 아버지식 위로였다. 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 나중에 그 친구가 그랬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한 게 우리 아버지가 처음이라고. 어쩐지 아버지 말에 지금까지의 모든 설움이 씻겨 내리는 것 같았다고.(141P)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249P)
아버지의 빨치산 생활은 1948년 겨울부터 1952년 봄까지 4년이었다. 그 4년이 평생 아버지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담당 형사가 바뀌면 그와 친해지고, 방황하는 아이를 격려하여 검정고시를 보게 하고, 나중에 미용실을 열 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문제가 생기면 '오죽허믄'을 앞세우고 달려갔다. 요즘 말로 아버지는 본캐(本캐릭터) 하나에 부캐(副캐릭터)는 사람마다 전부 달랐다. 그래서 아버지의 삶은 풍요로웠고, 죽은 후에 그 본모습이 본캐 뒤에서 찬란하게 살아났다.
나도 지난여름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사람의 삶이 죽음 후에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 있었다. 그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보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가 드러나는 건 죽음 이후에 알 수 있다. 내 아버지는 산림을 조성하는 일을 했고, 돌아가신 후에 단풍나무 숲, 전나무 숲, 소나무 숲이 남았다.
이 책은 장례 문화와 장례 절차, 아직도 살아 있는 상부상조의 전통을 발견하는 재미를 부가적으로 제공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 과정을 통해 가족의 역사, 각 사람들이 살아온 세월을 돌아본다. 역사의 한 장면을 살아낸 사람들의 삶은 치여했고,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의 삶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너무나 무거운 주제들이 얽히고설켜 있지만 술술 읽히는 매력이 있다. 재미도 있다. 쉽게 썼지만 가볍지 않은 책이다. 치열하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우리는,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책 속의 아버지는 "긍게 사램이제!"라고 말한다. 그럼 나는 무어라 말할까? 내 주변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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