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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불. 흙.바람 +나
8월의 기억(4)-8.13.~8.16. 본문
2022. 8. 13. 토. 대전 정수원 화장장에 11시 예약을 하였다. 대전 정수원은 대전 시민을 위한 시설이기 때문에 1회인 9시 30분에는 타지에서 오는 사람은 이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2번째 타임인 11시 타임에 예약이 된 것이다.
아침 8시 30분에 빈소에서 마지막 제사를 올렸다. 첫제사처럼 상주, 며느리, 딸과 사위, 손자 손녀 순으로 두 번씩 절을 하고 술을 올렸다. 그러고 나서 영안실(입관실)에 계신 아버지의 관을 모시고 버스의 아래쪽에 위치한 관을 모시는 자리로 이동하였다. 가족들이 모두 버스에 타고 출발하였다. 고향집 앞에서 멈춘 후에 영정사진과 위패를 든 손자와 손녀가 버스에서 내려서 고향집 안으로 들어가 방과 거실, 부엌을 돌아서 버스로 돌아왔다. 영정 사진이 아버지의 영혼을 대신하여 살던 집을 돌아볼 시간을 드리는 의미다. 인디언 속담에 말을 달리다가 영혼이 쫓아올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런 의미다. 육체를 떠난 영혼이 살던 집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버스가 대전을 향해 출발하고 나서는 아침부터 오던 비가 그쳤다. 그리고 밝은 구름이 있고, 해가 나오기도 했다. 10시경에 도착하여 가족들은 정수원 2층에 있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2층으로 가니 많은 가족들이 기다릴 수 있도록 넓은 공간이 있었고, 3층에는 식당과 카페가 있었다. 예정보다 빨리 진행이 되었는지 11시 타임에 진행할 화장을 10시 40분에 시작하겠다고 방송이 나왔다. 가족들은 1층으로 내려가서 버스 앞에 섰다. 화장장 측에서 관을 이동하는 차량을 가지고 나왔다. 상주와 사위, 손자가 커다란 카트 위에 관을 올리자 전동카트는 화장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가족에게는 10번째 공간이 배정되었다. 아버지의 영정사진과 위패와 화장 후에 모시고 갈 상자를 올려놓을 작은 탁자와 작은 소파가 4개 있었다. 창 너머로 화장로에 관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이후에 철판이 내려와서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벽면에 큰 전구에 불이 켜졌다. 이제 화장이 진행된다는 의미로 보였다.
화장 시간은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체구가 큰 사람은 좀 더 걸린다고 버스 기사가 말하는 걸 들었다. 우리는 유족을 위한 공간에서 머물다가 밖에 나와서 기다리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 가족 중 누군가는 영정 사진을 지키고 앉아서 기다렸다. 좁은 공간이라서 4명만 머물 수 있었다. 12시가 넘어서 화장로(火葬爐)의 벽면의 불이 꺼지고, 벽면의 철판이 올라갔다. 작은 상자에 담긴 뼈들을 담아서 카트에 밀고 입구쪽으로 이동하자 버스 기사가 우리 가족들을 화장장 입구 쪽으로 가도록 안내했다. 가족들에게 확인을 한 후에 다시 안으로 들어간 직원은 한지로 정성스럽게 싼 유골을 상장에 담아서 보자기에 싼 채로 가족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제 화장장에서의 일은 마무리가 된 셈이다. 가족들은 버스에 올라타고 고향의 공원묘지로 출발하였다.
아침의 예보에는 오후 3시 경에 비가 내린다고 했으나 대전 정수원을 빠져나오자마자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금산 랜드를 지날 때까지도 이어지더니 고향 어귀에 접어드니 비가 그치고 먹구름만 보였다. 공원묘지에 도착하여 잔디장 예약한 곳으로 가니 천막이 쳐져 있었다. 천막 아래에는 가로 세로 30센티 정도나 될 법한 네모 반듯한 구덩이가 파져 있었다. 안내하는 분이 따로 없고 버스 기사가 제사를 지내는 곳을 안내해 주었다. 묘에 안치하기 전에 드리는 제사인 평토제(平土際)도 첫제사처럼 상주부터 손자 손녀까지 순서대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평토제를 지낸 후에 상자 안에 모셔 온 유골을 땅속에 내려놓고, "취토요" 하고 말하면서 유족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삽으로 흙을 퍼서 유골 위에 덮어 드렸다. 이후 공원 직원이 나머지 흙을 덮고, 네모난 도구로 흙을 다져 눌렀다. 그런 후에 잔디 떼장을 얹은 후에 다시 다지기를 반복했다. 잔디가 잘린 자리에 마사토를 뿌려서 공간을 메우는 일로 잔디장 절차가 끝났다. 그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평토제가 끝나기를 기다려 주기라도 한 듯이 쏟아지는 비에 우리는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대여했던 옷들을 돌려주고, 고향집으로 갔다. 이렇게 5일장이 끝났다.
아버지의 침대와 쓰시던 책상과 사무용품들, 옷가지들이 아버지의 부재를 떠올리게 했다. 삼우제에 옷가지들을 태워서 돌아가신 분이 가져가실 수 있게 한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작은 방에 그대로 두고 차차로 정리하기로 했다. 돌아가셨다고 바로 쓰시던 물건들을 치우는 일은 고인에 대한 예가 아닌 듯 하였다.
삼우제는 장지에 모신 다음 다음날에 묘지를 찾아가서 제사를 지내는 일을 말한다. 예전에는 짐승에 의해 묘가 파헤쳐지는 사례가 많아서 묘가 무사한 지를 살피기 위해 찾아가서 안녕을 확인했고 그런 행사에서 삼우제가 유래했다고 누군가 말했다. 나는 무의식에 의해서인지 공원묘지로 가는 길에 다시 가슴 두근거림을 겪었고, 처방받은 약을 급히 먹어야 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전에 겪은 일에 대한 PTSD(트라우마)를 호소할 때 어떤 점이 힘든 지를 알지 못했는데 이번 경험으로 몸의 반응이 머리의 반응보다 5,000배가 빠르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을 겪으면서 그와 연결된 행사나 소식에 그때와 비슷한 충격을 몸으로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과호흡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살면서 한 번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당혹스럽지만 매번 예측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일은 인생에서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인생이 예측 불가능하니 내가 하는 일만이라도 예측 가능하기를 바라고, 지속 가능한 환경이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삼우제를 끝낸 다음날 한국을 떠나는 동생을 위해 함께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찾았다. 코로나 이전보다 한산한 분위기였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어디 머물렀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를 묻는 절차가 있어서 물으니 보안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시애틀을 경유해서 뉴욕으로 가기 위해 짐을 기내로 가지고 들어간다고 해서 사촌들이 준비한 화장품과 홍삼 선물을 가져가지 못했다. 개인당 100ml 액체류 제한이 있고, 화장품은 파우치 안에 든 것만 허용한다고 하니 다음 방문까지 집에 잘 보관하기로 했다. 다음 방문은 가을이 끝나는 11월로 잡았다. 가급적 김장철에 와서 김장축제에 함께 하라고 당부했다. 동생은 일정을 잘 조율해 보겠다고 하고 떠났다. 서울에서 뉴욕까지의 거리가 11,000km라고 한다. 긴 비행시간은 직항이 14시간이고, 시애틀을 경유하여 뉴욕에 가려면 시간은 더 많이 소요될 것이다. 요즘 석유 가격의 폭등으로 비행기 요금이 부르는 게 가격이다 보니 경비가 많이 들었을 것을 염려하여 어머니와 형제들이 비행기 값을 보탰고, 동생은 형제들과 어머니를 위로하며 용돈에 보태라고 조금씩 전하고 갔다.
큰 일을 치르고 보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가 보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으나 이전의 삶과는 또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보이는 것도 이전에 보던 것과 달라졌다. 가족을 떠나 보내는 일은 아무리 연세가 많을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갑자기 떠나보내서 섭섭하다고 내가 말했더니 누군가는 말한다. "암으로 앓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어요.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어떻게 가족을 보내도 섭섭함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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