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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기억(3)-8. 10.~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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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기억(3)-8. 10.~12.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2. 8. 22. 16:14

   부고를 누구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가를 정하기로 했다. 전에 부고를 많이 받아왔던 터라 받은 문자메시지를 참고하여 부고를 작성하였다.   만든 부고를 형제들의 카톡으로 보내고, 각자 지인들에게 보냈다. 또, 아버지의 지인 분들께도 보내기로 했다.  아버지는 2G 폰을 쓰고 계셨고, 모든 전화번호는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 그 메모와 임우회, 행정동우회 등의 수첩에 적힌 명단을 대상으로  20대의 손자 손녀가 메시지 보내는 일을 담당하기로 했다. 한 사람은 번호를 부르고, 한 사람은 입력하면서 하니 150여 명의 지인들께 보낼 메시지도 30분 정도에 마무리가 되었다. 전날 예약 문자로 남겨 놓아서 11시쯤 전송이 되게 하였다. 

 

  나도 회사에 부고를 문자로 알리고, 상사에게는 전화로 알렸다. 부고를 작성하여 알리는 일도 경황이 없는 와중에는 큰 일로 여겨졌다. 연세 많은 부모님이 계시면 미리 작성해서 보관해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방학 기간이라 전에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과 지인들에게는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 다만 코로나 확진자가 다시 10만명을 넘어서고 있어서 정중히 조문은 사양한다고 양해해 주시라는 안내 문자를 덧붙였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시니 장례식 말고도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이 생겼다. 평소 거래하던 은행 업무를 정리하는 일이다.  사망신고 전일지라도 아버지의 통장을 어머니 앞으로 돌려 놓으려면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두 모여서 은행에 가야 한다고 했다. 동생이 미국에 살고 있으니 자주 나오기가 어려운 상황이니 이번 기회에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장례식을 5일 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8월 10일 , 11일은 조문을 받고, 11일(목)에 동생이 귀국하면 함께 은행에 가서 12일(금)은 은행 업무를 마무리 짓고, 13일(토)에 화장장에 가서 화장을 하고 공원묘지에 모시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지난 일이라 정리하여 말할 수 있으나 그 당시에는 하나를 결정할 때도 우왕좌왕하고,  다섯 형제와 어머니의 의견을 모아야 했다. 군에서 운영하는 공원묘지에도 방문하여 수목장과 잔디장, 납골당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수목장은 나무 한 그루 주변에 12개의 비석이 빙 둘러서는 구조이고 나무 그늘이라 답답해 보인다는 의견이 모여졌다. 납골당은 신내라서 답답하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잔디장으로 하기로 하였는데 차례대로 번호를 받기 때문에 부부가 나란히 묻힐 수는 없다고 한다. 만약 나란히 묻히려면 납골당에서 기다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잔디장에 나란히 묻힐 수 있다고 하였다. 한시라도 답답한 납골당에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다소 거리가 생길 지라도 아버지 따로 잔디장에 모시기로 결정하였다. 45년간 1년에 1만 원씩 사용료를 내야 한다. 45만 원을 내고, 비석 비용으로 15만 원을 내면 된다. 다만 국가유공자는 45만 원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비석 값만 15만 원을 내기로 하였다.  인구수가 적은 지자체는 죽음 이후에 제공되는 혜택이 도시보다 넉넉한 인심을 베푸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8월 10일 수요일은 11시에 식자재, 식탁보, 휴지, 숟가락, 젓가락 등등의 마트 배송품과 떡, 꽃이 차례로 마련되었고, 빈소가 꾸려졌다. 흰 국화를 중심으로 제단을 꾸미고, 영정사진을 올리니 제단이 완성되었다.  밤, 대추, 포, 술, 과일로 간단한 제상(祭床)이 차려졌다.

제상과 제단이 꾸려지자 장례식장 직원이 상복을 가지고 왔다.  남자는 검정 재킷에 양복을 넥타이까지 갖추어 입고, 여자는 검은색 한복을 입었다. 남자 옷은 대여하는 것이고, 여자 옷은 일회용이라 입고 나서 버려도 된다고 하였다.  왜 남자와 여자의 옷이 다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걸 물을 겨를도 없었다.

 

 언니가 화환(조화)이 많이 안 들어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많이 들어와서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돌아보니 10여 개의 화환이 놓여 있어서 아버지, 우리 형제, 사위, 손자 손녀가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장례식장 직원이 가족들을 모이도록 하고 첫 제사를 진행하였다. 상주가 나와서 두 번 절 하고, 술을 올린 다음, 며느리, 딸, 사위, 손자, 손녀까지 차례로 술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절을 한 후에 모두 두 번 절하고 마무리하였다.

 

 조문 첫 날이라 주로 친척 분들이 먼저 방문하였다.  수도권에 머물던 장마 전선이 남쪽으로 내려와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 빗 속에서도 외삼촌과 외숙모, 외사촌을 시작으로 회사 동료들, 아버지의 지인 분들이 조문을 오셨다. 손자 손녀가 여섯이나 되니 따로 음식 접시를 나르는 서비스 도우미를 고용하지 않아도 너끈히 해결되었다. 너나없이 나서서 필요한 역할을 해내는 손자 손녀를 보고 아버지도 흐뭇하셨을 것이다. 

 

 조문 첫 날은 저녁 11시가 넘자 조문객이 모두 돌아갔다. 예전처럼 술을 마시거나 화투를 치거나 하는 문화가 없어져서 조용히 지냈다.  장례식장 안에는 따로 방이 두 칸이 있고, 화장실과 욕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고향집이 차로 5분 거리도 안되어 가까우니 손자 손녀들은 집으로 가서 자도록 하고, 형제들과 사위, 어머니는 장례식장에 딸린 방에서 자기로 했다. 이불이나 필요한 것은 고향집에서 가져올 수 있으니 그런 점은 편리하였다. 

 

 조문 두번째 날인 8월 11일은 아침부터 비가 더 많이 쏟아졌다. 꼭 참석할 분이 아니면 많이 오시지 않을 것 같았다. 어제 참석하지 못한 친척 분과 친구분들, 아버지의 지인들이 가끔 오실 뿐이니 준비한 음식도 그대로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세 분이 간자미 무침 등 전라도식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니 다소 연세가 있어서 어릴 적 잔치 음식을 기억하는 분들은 음식이 맛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빗속을 달려와 준 분들께 그나마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을 대접하게 되니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오실 분들은 와 주셨다.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오후 4시경에 가슴이 갑갑하고 뒷머리 쪽으로 피가 몰리는 증세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보건의료원에 속한 장례식장이라 보건의료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갔다.  혈압을 재보니 160까지 올라가 있었다.  평소 저혈압이거나 정상 혈압이었는데 혈압이 오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과호흡이었던 것을 말하니 "걱정 마세요. 놀래서 그런 거니 약 지어드릴게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의사 선생님이 말하였다. 나는 당장 괴로운데 약을 받아서 먹으라니...... 회복을 위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영양제 수액을 처방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액실에서 수액을 맞고 장례식장으로 돌아가니 또 가족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나의 몸이 나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더 이상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쉬어야 했다. 

 

 목요일 저녁 6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동생이 대전까지 ktx를 타고 내려오면 가족 중 누군가가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비가 쏟아지는데 야간 운전을 해서 동생을 픽업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동생과 사촌이 함께 타고 가서 야간운전 하는 남편에게 도움을 주었다. 동생은 11시 경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입관을 보기 위해 뉴욕에서 출발하여 먼 길을 왔으니 그 마음에 담은 눈물이 한순간에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5일장을 하면서까지 기다린 동생이니 아버지도 기뻐하실 것이 분명했다. 

 

 8월 12일(금)은 예정대로 오전에 읍내에 있는 은행에 들러 은행 업무를 보았다. 내가 몇년 전부터 매월 보내드리는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놓은 걸 확인하니 마음이 아팠다. 직원이 눈물을 보이면서 말한다. "이렇게 매달 돈 보내는 거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자식을 잘 키웠다."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면서 자랑스러워하셨다고 한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인데도 매월 통장을 찍어보는 재미로 사셨을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나는 용돈을 보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아버지를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한달 전에 만났을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대로 장례비용은 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통장에 있는 돈으로 치르기로 했다. 자식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세상을 끝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니 더욱 가슴이 묵직하였다. 평소 아끼고, 아껴서 저축하는 것을 미덕으로 평생을 사신 덕분이다. 요즘 유행하는 플랙스(Flex, 자신의 성공이나 부를 뽐냄)나 욜로(YOLO,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는 태도)와는 너무나 먼 삶이었다. 그게 부모인가 보다.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공원묘지가 있고, 국가유공자의 혜택으로 화장비용과 장지 사용료는 무료, 장례식장 비용은 반값만 내면 되었다. 결국  아버지가 준비하신 장례비의 절반으로도 충분하였다. 평소 어른의 모습을 먼 데서 찾았는데 자식들을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을 이번 장례를 치르면서 아버지의 모습에서 발견하였다. 한편으로 죄송하고, 또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만 하다. 

 

 입관은 8월 12일(금) 오후 5시에 진행되었다.  이미 30년 전에 마련해 놓은 수의를 입혀놓고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 모습만 공개하였다. 아버지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마지막에 장폐색 수술을 견디고, 심장마비까지 와서 더욱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고, 심폐소생술을 겪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지막 말씀 "죽으나 사나 수술을 해야 한다니 수술해야지. 걱정마라."을 하실 때 이미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나는 다만 한 가지 아버지가 편안히 세상을 떠나셨기를 바랄 뿐이었다. 

 

 얼굴을 삼베로 덮고 몸을 삼베로 감싸서 묶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묶는 작업이 끝난 후에 붉은 천으로 덮고 관의 뚜껑을 닫았다. 그 후 관을 묶어서 다시 냉동고에 넣는 절차를 진행했다. 아버지의 입관 모습을 모든 후손이 모여서 함께 지켜보았음에 아버지는 기뻐하셨으리라. 특히 멀리서 달려와 준 막내딸이 함께 해서 더 기뻐하셨으리라.  늦둥이로 얻은 딸이라 예뻐하고 막내딸이 권하자 단번에 담배도 끊은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나는 빈소에 향이 끊이지 않도록 올리고 아버지의 편안한 귀천을 기도했다. 다음날은 화장장으로 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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