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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념의 미학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1. 8. 24. 22:27

 

지인이 시골 마을에 자리를 잡고 귀농을 했다. 

귀농과 귀촌의 차이를 아는가?

 

귀촌은 시골 마을에 내려가서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전원주택을 지은 사람이 해당된다.

귀농은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일을 직접 하는 것을 말한다.  전원주택도 짓고(아님 말고), 농사를 짓기 위해 거주하는 사람이 해당된다.

 

 그 마을에 가면 나이가 90을 넘어 허리가 굽었어도 쉬지 않고 논일, 밭일을 하는 어르신을 만날 수 있다.  자식들이 농사일을 못하게 해도, 전화해 "어머니, 지금 어디세요?"하면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응, 나 시원하게 에어컨 바람쐬고 쉬고 있다."라고 말한단다.  그동안 해온 습관이 있으니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병원을 다니면서도 밭일을 하고,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거다.

 

 사람이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이기에 요즘 '단념의 미학'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사람이 때가 되면 자리를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다.  20-30대가 모여서 이야기 나누고 있는데 50대가 '나는 동안이야' 하면서 끼어들면 대화가 잘 될까? 아마 서로 관심사가 다르기에 그 대화는 수 분안에 끝나버릴 수 있다. 그럴 때 그 대화의 자리를 알면서도 단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앞에서 예를 든 밭일 하는 경우를 보자.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90세를 넘어 굽은 허리로 지은 농사를 받는 자식이 마음이 편할까? 불편할까? 진정 자식들이 원하는 건 고춧가루, 깨일까? 아니면 부모님이 병원에 덜 가고 편안히 사는 걸까? 를 생각해 보면 나오는 답이지만 '단념'은 쉽지 않다. 때로 일도 중독이 된다. 특히 평생을 해온 농사일은 몸에 배어 '단념'이 되지 않는다.  일을 빼고는 삶을 말할 수 없었던 우리 부모님 세대의 삶의 나이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때로 단념하고 포기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껏 '포기는 배추셀 때나 쓰자.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포기하지 마'....... 단념하고 포기하는 것을 극도로 나쁜 것으로 치부하여 왔다. 그래서 '하면 된다'라는 너무나 억지스러운 말로 '안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서라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강요받아 왔다. 그러다 보니 '단념'은 너무나 낯선 말이 되어 버렸다.

 

 개성을 말할 때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잘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자기 내면에서 열정을 끌어낼 수 있는 불쏘시개 같은 역할을 하고, 그로 인해 '남다른' 결과물을 얻어내고, 인정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단념'을 할 필요가 있다.  되지 않는 욕심은 접어 버리고,  이 순간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비워내는 습관이 필요해 보인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집에 있는 물건들을 줄이기로 했다. 집을 넓게 쓰기 위해서다.  10년이 넘어서자 화분이 20여개다.  느낌이 있는 나무 천냥금, 행운목, 산호수, 올리브, 마리안느, 제라늄, 장미허브 등을 남기고 아파트 현관 앞에 내다 놓았다.  내다 놓고 1시간 후에 가 보니 빈 화분과 다른 화분들까지 모두 다른 사람이 가져가고 없다.  가져가서 잘 키우기를 바라면서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이제 당분간  '단념'을 화두로 삼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