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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에 숨은 역사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1. 8. 22. 23:26

현충사는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유난히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어서 보기에 좋다.

 

  유발 하라리의 책 <호모데우스>를 읽고 있다.

잔디의 역사에 대한 재미있는 관찰과 내용을 보고 그동안 잔디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 해결된 것을 느낀다.

 

 오래 전 현충사에 갔다가 잘 가꿔진 잔디 가자자리에 말뚝을 받아서 빙 둘러서 줄을 매 놓고는 군데 군데에  '잔디 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라고 팻말을 붙여 놓은 걸 보고 의아해 한 적이 있다. 이렇게 잘 가꾸어 놓은 건 누구를 위해 가꿔놓은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현충사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하라리는 <잔디의 역사>에서 부와 권위의 상징으로 쓰인 '잔디'에 대해 말한다.

산업 혁명 이전까지 잔디는 왕이 사는 궁이나 백작 등의 계급이 높은 사람들의 저택에 심고 가꾸는 사람이 따로 있어야 하는 매우 까다로운 식물이었다. 평민들은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전염병, 기근에 시달리는 마당에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식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민 계급과 귀족 계급을 나누는 역할을 잔디가 해 주었고,  잔디는 귀족계급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잔디밭은 파티나 특별한 행사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열리지 않고 관리되어 늘 푸르고 고르게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서 귀족계급의 자랑이 되어주었다.

 

 이후 20세기가 들어서면서 스프링쿨러가 등장하고, 미국인들이 집앞의 뜰에 잔디를 심기 시작하면서 미국인들은 매주 일요일 교회에 다녀와서 잔디를 깎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만약 집앞의 뜰에 잔디를 깎지 않거나 관리가 되지 않으면 그 집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왕이나 귀족 계급이 누리던 잔디의 위용을 자신도 함께 누리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미국 뿐만 아니라 아랍에미레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사막 국가에서도 집을 짓고 정원에 잔디를 심고 가꾼다고 한다. 이제 잔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심는 식물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잔디는 스포츠의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초록의 잔디밭 위에서 펼쳐지는 축구 경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초록의 잔디밭 위에서 공을 날리는 골프의 경우는 구경꾼들을 '갤러리'라고 한다.  흔히 갤러리라고 하면 그림을 보는 미술관을 말하는데, 골프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골프 치는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잔디밭 바깥으로 줄을 치고 그 밖에서 구경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카메라나 TV가 없던 시절이니 선수가 치는 공이 그저 작은 점으로나 보였을까? 아니면 선수가 점처럼 보였을까? 일반 대중에게 잔디밭에서 골프치는 선수는 하나의 작품처럼 보여졌다.

 

  이제까지 공원에 있는 잔디밭에 마음대로 들어가서 앉아 있거나 걷도록 허락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특히 현충사 같은 기념관의 경우라면 품격을 높이고자 잔디를 잘 가꾸는 것을 좀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하찮게 보이는 식물인 잔디에도 이렇게 우리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되니 초록의 싱그러운 잔디가 새롭게 보인다.  하라리에 의하면 전세계에서 벼와 밀 다음으로 가장 많이 거래되는 식물이 잔디라고 한다. 아직도 잔디는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고, 그 역사는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의 영어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