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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 말씀만 하소서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3. 12. 17. 23:09

  슬픔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여정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수필 같기도 한 일기다.  흔히 자식을 잃은 슬픔을 참척(慽)이라고 한다.  참혹할 참(慘)에 슬플 척(慽)이다.  어떤 슬픔보다 크며,  가슴에 묻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형벌 같은 일이라고 한다.  1988년 한창 왕성하게 소설을 쓰던 무렵, 남편이 암으로 세상과 작별했고, 4개월 후 의과대학생인 아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두 죽음이 차례로 덮쳤으나 남편의 죽음은 예고된 죽음이었다면 스물여섯 살 아들의 죽음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슬픔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엄청난 고통으로 뼈에 아로새겨야 가능할 일일 터,  작가가 슬픔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일기로 썼다. 

 '겨우 생각해 낸 말이 잊으라는 소리다. 어쩌면 한결같이 잊으라는지 세월이 약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격렬한 반감이 솟구칠 때도 없다.' 말로 어떻게든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때로는 말이 거추장스러운 때가 있으니 바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녀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얼굴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겐 잡아줄 손이 필요했다. 죽는 날까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란 건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원통함에서만은 놓여나고 싶었다.(p.93)'

 

   한 집에서 살다 남편을 보내고,  의대를 나와 인턴생활을 하던 아들마저 죽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살던 서울 집에서는 도저히 지낼 수 없었던 그녀가 선택한 건 부산의 수영만이 보이는 딸네 집이었다.  거기서 지내다 이해인수녀의 소개로 분도수도원에 머물게 된다.  홀로서기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철저히 혼자가 되어 슬픔을 표출하고 싶었다.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참으려니 온몸이 격렬하게 요통을 쳤다. 엄숙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에 차마 소리 내어 울 수가 없었고 그게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129p) 그리고 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p.102)'

  그러나 신이 주는 답은 언제나 '그래 여기 있다!'는 식으로가 아니라 누군가를 통해 전해지는 법이다.  수도원에 온 한 대학생이 속 썩이는 동생을 보면서 늘 속상했는데 '왜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와 '왜 내 동생이라고 저러면 안 되나?'로 생각을 바꾸면서 마음이 전환되었다는 말을 듣고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 먹을 수만 있다면...... (p.126)

 

  결국은 발견한다. '만일 작은 꽃들이 모두 장미가 되려 한다면, 자연은 그 봄단장은 잃어버리고, 들은 이미 가지가지의 작은 꽃으로 꾸며지지 못하리라.' '모든 꽃들이 아름답다. 장미의 화려함이며 백합화의 결백함으로 인해서 작은 오랑캐꽃의 향기 나 들국화의 순박한 매력이 없어지지 않는다.'(p.148~149) 밥을 거부하고 먹은 것을 토해가며 죽지 못해 살았고, 자신 앞세운 어미의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뒤로하고 밥을 먹고 기도를 하였다.  미국으로 도피하듯이 떠났으나 말과 글이 낯선 곳보다는 말과 글이 있는 땅으로 와서 말과 글로 슬픔을 써 내려갔다.  박완서 작가의 글은 그런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글이지만 특히 이 책 <한 말씀만 하소서>는 슬픔 속에서 홀로 서려고 몸부림치며 신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찾은 과정이 담겼다.  작가가 아니라 한 어머니의 울부짖음과 몸부림으로 슬픈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순간의 마음을 담았다. 

  새로 사귄 친구가 선물로 준 책이다. 내가 책 읽기를 하고,  글을 쓴다니 이 책은 꼭 읽어야 한다면서 건넨 책이다.  말과 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건 거추장스러운 겉치레에 불과하며, 삶과 죽음 사이의 간발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감정들을 담지 못한다면 그건 그저 한낱 불쏘시개에 불과하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친구 S 씨, <한 말씀만 하소서>를 올해 안에 읽게 되어 기뻤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