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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이 아름답다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3. 1. 6. 22:44

방학이라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본다. 인디언이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멈춰 서서 영혼이 따로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2022학년도를 마치고 영혼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진다. 점심시간 학교 주변 한 바퀴를 돌아보다 골목길 탱자나무에 쪼그라진 채로 매달린 빛바랜 탱자를 바라본다. 담 밑에 떨어진 탱자 하나를 주워서 학교 텃밭으로 가 보니 정갈하게 갈무리하고 남은 흙더미 위로 눈이 하얗게 덮였다. 소한 추위는 꿔서 라도 온다는데 올 겨울 소한 추위는 맥을 못 추는 대신에 미세먼지가 많아졌다.

KBS TV <인생정원>을 연달아 세 편을 봤다. 서울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괴테를 연구하다 전 재산을 털어서 여주에 <여백서원>을 만든 전영애교수가 그 첫 번째다. 퇴직 후 10년 동안 일구었다는 서원은 향후 2~300년을 내다보고 만들었다는데 한옥과 정원이 산을 끼고 있다. 1만여 평에 이르는 부지에 연못, 산책길 등이 있고, 앞으로 괴테마을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한다. 전교수는 자신이 일군 서원을 찾아오는 이들과 나누는 일을 기쁨으로 여긴다. 퇴직하고 나서 자신은 '박수부대'로 살기로 했단다. 잘했다고 격려하고 응원하는 박수부대 말이다. 그런다고 그가 그냥 박수만 보낸 건 아니다. 자신의 손으로 나무들을 옮겨 심어 자칭 '나무고아원'을 운영하고, 쉴 새 없이 꽃을 가꾸고 나무를 길러낸다. 그는 '올바르게 살아서 손해 볼 거 같아도 그렇지 않더라. '라고 말한다.

두 번째는 오산 서랑호수 옆에서 <아내의 정원>을 꾸미고 사는 83세 할머니와 할아버지다. 20년 전에 자리잡은 곳에서 봄부터 가을까지는 꽃과 나무를 가꾸고, 겨울에는 퀼트로 꽃을 만드는 할머니는 의사가 10년 남았다고 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게 어린 시절 살던 집의 정원을 꾸미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집은 북한이었다. 1.4. 후퇴 때 마지막 함선을 타고 내려왔기에 되돌아갈 수 없는 고향집 정원을 서랑호수 옆에 꾸며 놓았다. 할아버지가 꽃대를 치우고, 농사를 짓는 일을 하는 사이 할머니는 꽃을 키우고 닭을 돌본다. 무농약으로 기른 배추로 김장을 하면서도 "1년 내 먹는 김치를 만드는데 이런 걸 수고라고 할 게 있을까요? 얼마나 소중한데요."라고 말한다. "꽃이 졌어도 저 나무 안에 꽃이 있다는 걸 아니까 기다려져요."

세 번째는 경남 진주시 집현면에서 홍매화 언덕을 만든 부부의 이야기다. 야생화의 매력에 빠져 야생화 농원을 하느라 비닐 하우스에서 아이들을 키우기도 했지만 힘들지 않았단다. 진주혁신도시를 만드느라 캐서 버려질 운명인 매화나무를 구조해서 매화동산을 꾸몄다. 자신의 땅이 아니라 가족에게 빌린 땅이지만 열심히 가꾸고 길러낸 덕분에 봄이면 명소가 되어 찾는 이들이 줄을 선다. 1년을 활영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맑은 눈을 하고서 흙으로 돌아갔다. 그 후 아들이 할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할머니와 매화를 돌본다. 이들이 매화를 키우는 이유는 매실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다. 순전히 매화를 보기 위해서다. 방문한 이들은 "나도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한다.

세 분의 여성들의 공통점은 매우 낙천적이라는 점이다. 얼굴에 근심이 없고, 웃음이 끊이지 않으며 평안함을 전한다. 특히 진주의 할머니는 남편을 떠나보낸 직후인데도 담담하게 인생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꽃을 통해서 배웠기에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유전자에는 원시시대 적부터 쌓인 경험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 속에는 경작의 기쁨과 보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세 분은 농사를 지어 수확을 거두는 기쁨을 뛰어넘어 꽃과 나무가 주는 평안과 기쁨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사는 삶을 선택한 분들이다. 한결같이 자연과 하나된 모습이 아름다웠다. 세 분 모두 자신이 아껴 기르는 꽃인 듯 보였다. 전영애교수는 노란 수선화를, 서랑호수 <아내의 정원> 할머니는 주황색  나리꽃을, 진주시 집현면의 홍매동산의 배덕임할머니는 꽃분홍 홍매화를 닮았다.

사람들이 도시에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 보며 아파하고, 몸에 난 상처를 핥는 동물들처럼 신음하고 있을 때 세 분의 할머니는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고 꽃과 나무를 돌보며 가꾸고 거기서 한발 나아가 사람들이 와서 쉬어갈 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은 하는 사람은 얼굴도 아름답고, 뒷모습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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