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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파친코 본문
역사는 시간을 가로지르고, 공간에 머무른다.
배우 윤여정이 74세에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이후 애플 드라마 <파친코>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진 소설이다. 이민진 작가는 한국계 1.5세대로 제2의 제인 오스틴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변호사 공부를 한 작가가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두각을 드러낸 셈이다. <백만장자들을 위한 공짜 음식>이라는 장편소설이 호평을 받았고, 이민자로서의 삶에 관심을 갖고, 일본계 미국인 남편과 함께 일본에 머문 4년 동안 취재한 내용을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설<파친코>pachinko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선자라는 인물이 주인공이고, 주변의 인물들이 선자를 중심으로 시대를 흘러가면서 태어나고, 만나고, 헤어지고, 죽는다. 1910년부터 1989년까지 80년의 역사가 소설 속에 강처럼 흐른다.
1910년은 한국의 역사 연대표상 지우고 싶은 사건이 발생한 해이다. 일본의 강제 병합으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진 해이다.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옮겨오면서 조선은 거대한 세계 정세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다. 역사상 평화로운 시절은 얼마나 있었을까? 소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대로 상관없다."
나라를 빼앗겼는데 상관이 없을 리가 있는가? 언청이인 훈이와 얼굴 한 번 안 보고 암탉 몇 마리, 면 옷, 수수 몇 자루를 친정에 보태고 군입을 줄이고자 결혼한 양진과의 사이에서 선자가 태어났다. 선자는 위로 세 아이를 잃고 나은 딸인데 다행히 언청이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사업한다는 한수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자 선자는 편하게 사는 현지처를 마다하고 한수와의 인연을 끊는다. 하숙생 이삭과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거기도 조선인에게는 차디찬 냉대만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일생은 고달파도 자식을 기르는 사랑은 눈물겹다. 아버지 이삭은 노아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넌 겸손하고 성실한 아이가 틀림없어.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거라. 적에게도 말이야. "
일본에 건너간 이삭과 선자가 간 곳은 오사카시의 이카이노였다. "이곳은 돼지들과 조선인들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황국신민, 내선일체 등을 내세워 동화시키려 했으나 조선인들은 식민지에서 온 노예나 다를 바 없었다. 해방이 되고도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전쟁이 일어났고, 돌아갈 고향은 미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부모들은 죽고 없었다.
"가끔씩 고향이 그리워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고국이라는 게 없어."
고향은 이름이자 강력한 말이다.
마법사가 외우는, 혹은 영혼이 응답하는 가장 강력한 주문보다 더 강력한 말이다.-찰스 디킨스-
이 말은 소설 앞 부분에 있는 말이다. 한수, 선자, 경희, 요셉처럼 돈을 벌기 위해, 또는 이삭처럼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지라도 결국 그 누구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였다.
선자의 아들 노아는 성경 책에서는 방주를 만들어 세상을 구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어렵게 와세다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가 한수임을 알고 크게 실망한 나머지 파친코 사업을 하며 지내다 엄마 선자가 찾아간 날 자살을 하고 만다. 노아를 공부시켜 부모보다 더 아는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보다 아들의 실망이 더 컸다. 둘째 모자수(모세)는 광야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인물이다. 그런 이름을 받았지만 놀림을 받는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어 손꼽히는 사업가가 된다. 그런 모자수도 자신과 다른 세상을 살게 하고 싶어 아들 솔로몬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은행에 취업시키지만 일본인 동료에 의해 배신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택한 길은 아버지와 같은 길인 파친코 사업을 이어가는 길이었다. 파친코 사업은 한국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하다.
80년이 흘러 3세대로 이어지고 있지만 1989년에도 재일 한국인은 3년에 한번 외국인 등록증을 갱신하고, 성인이 되면 열 손가락의 지문을 등록해야 하며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일본인들의 멸시와 따돌림을 감내하면서도 여전히 그 곳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나무처럼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재일 한국인이 한국에 온다면 그들은 한국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 한국말도 서툰 일본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이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너희 아버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파친코를 선택한 게 분명해. 후지나 소니 같은 회사에서는 조선인을 고용하지 않아. 일본의 많은 곳에서는 아직도 조선인(자이니치)들을 교사나 경찰, 간호사로 고용하지 않아. 넌 돈을 많이 버는데도 도쿄에서 방을 빌릴 수 없잖아."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외국인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거야. 넌 언제나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 거라고. 절대 일본인이 되지 못해."
일본에서 파친코 사업은 자동차 제조업모다 규모가 크다고 한다. 파친코 사업이 야쿠자와 연결되어 있어서 더러운 돈이라고 치부하기에 그나마 조선인(자이니치)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된 것이다. 조국이 두 나라로 나뉘어 북한을 선택한 조총련(재일본조선총연합회)과 대한민국을 선택한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라는 두 단체가 일본에 있다. 이들이 뿌리내리고 살 곳은 한국임에도 고국을 지척에 두고 외국인으로 취급받으며 뿌리 없는 나무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새롭게 재조명해 준 소설이 <파친코>이다.
소설 <파친코>는 1권은 고향(1910-1952), 2권은 조국(1953-1989)을 제목으로 한다. 1권은 부산 영도를 배경으로 어부들이 하숙하는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 머문 이야기, 전쟁 막바지에 고구마농장에서 양진을 만난 이야기 등으로 이어진다. 2권은 파친코 사업을 하게 된 배경과 2세대인 모자수가 중심이 되어 다음 세대엔 솔로몬으로 이어진다. 1권은 세밀화처럼 차곡차곡 쌓아가는 필체로 그려낸 반면 2권은 드로잉 수준으로 빠르게 전개하여 결말을 너무 빠르게 전개한 면이 없지 않다. 노아의 죽음은 단 한 줄로 묘사되었다. 소설의 묘미일 수도 있으나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여지를 일축해 버리는 수준은 소설 읽는 재미를 줄여준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번역체가 심하게 드러난다. 영어로 쓰인 소설이라서 그런지 읽는 내내 불편하였다.
"불편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절 찾아오세요.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
"먹고 싶은 걸 사달라고 조르거나 밤에 베개가 더 필요하다고 유난을 떨어봐요."
이 문장들은 입으로 말하는 구어체가 아니다. 글로 쓴 말이다. 문어체라서 목에 가시가 걸린 기분으로 글을 읽었다.
그럴지라도 소설 <파친코>를 읽는 내내 선자, 경희,이삭, 요셉, 한수, 이삭, 노아,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더듬으면서 지금 한국의 2022년을 사는 삶을 빗대어 보게 된다. 지금 자본주의와 포퓰리즘으로 흔들리는 세계정세 속에 처한 한국의 현실이 1910년 한일 강제합병 사건이 일어난 때와 결코 다르지 않음을 읽게 되었다. 작가가 일본, 미국, 한국을 잇는 대장정의 소설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자신도 미국 이민자로서 겪은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드라마로 나와서 호평을 받고 있다. 소설로 읽었을 때나 드라마로 보았을 때는 분명 다를 것이다. 주인공들의 삶을 좀 더 들여다 보고, 작가의 시선을 함께 느끼고 싶다면 소설을 읽기를 권한다. 뿌리는 내리지 못할 지라도 박쥐란, 틸란트시아 등 공중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식물도 있어서 그런 식물을 행잉(hanging) 식물이라고 한다.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내리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꽃을 피우는 민들레도 있다. 나라는 망해도 국민은 망하지 않는다. 작가의 말처럼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삶은 계속된다.
노아가 자신이 조선인이라서 벗어날 수 없는 굴에 속에 살고 있다고 울부짖는 말에서 재일교포, 재미교포 등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아가는 지난(至難)한 삶들을 대면하게 된다.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그럼에도 삶을 직면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전 평생 동안 제 피가 조선인의 것이라는 일본인들의 말을 들었어요. 조선인들은 화를 잘 내고 폭력적이고 교활하고 거짓말을 잘 하는 범죄자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견뎌야 했어요. 백이삭처럼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절대 목소리를 높인 적도 없었죠. 하지만 이 피는, 제 피는 조선인의 것이죠. 그런데 이제는 이 피가 야쿠자의 피라는 걸 알았어요. 제가 무슨 짓을 해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죠. 차라리 제가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 거예요. 어떻게 엄마가 제 인생을 망쳐놓을 수가 있죠? 어떻게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할 수 있냐고요? 어리석은 엄마, 범죄자 아버지라니. 난 저주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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