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불. 흙.바람 +나

[영화평]스윗 프랑세즈 본문

영화로 보는 세상

[영화평]스윗 프랑세즈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2. 6. 18. 22:09

왼쪽의 유대인엄마와 딸은 파리에서 피난온 가족(작가의 그림자를 찾는다)이다. 오른쪽은 주인공 뤼실이다.

 동명의 소설 <스윗 프랑세즈(Suite Française)>를 영화한 작품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월 이후 계속되고 있는 2022년 6월에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스윗 프랑세즈(sweet  france)로 읽었기 때문이다. 삶이 전쟁이고, 경쟁인데 전쟁 영화를 선택해서 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스윗 프랑세즈(Suite Française)>의 suite는 스위트룸의 그 스위트가 맞다. 달콤한 방(Sweet room)이 아니다.  suite room은 연결된 몇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말한다. 스윗 프랑세즈(Suite Française)는 프랑스풍의 몇 개의 소곡 모음곡이라는 뜻이다 . 영화에서 주인공 부루노 폰 팔크 독일군 중위가 작곡하여 뤼실 앙줄리에에게 선물한 그 곡의 이름이기도 하다. 

 

 독일군 중위와 프랑스 여성의 사랑을 그린 영화로 본다면 로맨스 영화로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스윗 프랑세즈(Suite Française)의 작가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렌 네미로프스키로 1942년 독일군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남편 미셀 앱스타인도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이렌이 체포되기 직전까지 썼던 작품을 딸이  62년을 간직한 끝에 2004년에야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소설 <스윗 프랑세즈(Suite Française)>는 1부 6월의 폭풍, 2부 돌체로 구성되었고, 1부는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독일의 프랑스 공격 소식을 듣고 파리에서 근교의 시골 뷔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2부는 독일군 중위와 뤼실과의 사랑을 그렸다고 한다. 나는 아직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 

 

 이 영화에서 내가 눈여겨 본 장면은  독일군이 뷔시시를 차지하여 변화되는 마을의 모습과 사람이 전쟁 중에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다. 

독일군이 뷔시시에 탱크를 몰고 와서 확성기를 들고 동네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장면이다.

"폐탱장군의 권한으로 서명함으로써 프랑스 점령지구의 새 헌법이 결의됐으며 이 법은 노동권과 가족권, 조국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다. 너희는 패배했고, 이제는 우리가 통치한다. 무기류는 모두 내일 아침까지 독일군 본부로 양도하라. 총통께서 말씀하시길 "칼은 우리의 쟁기가 되고, 전쟁은 눈물로부터~~미래의 세대를 위한 일용할 양식이 자라날 것이다." 임시숙소로 선정된 가정들은 집으로 돌아가 군인들을 맞이하라." 독일군의 말에서 어떤 위협적이거나 난폭한 언어는 없다. 권리는 보장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일용할 양식도 보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정의 수준에 맞게 군인들을 지정하여 '적과의 동거'를 선포한다. 적들은 존재만으로도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패해 겪은 36년에 비하면 4년은 짧은 시간일 수 있으나 나라를 잃은 국민이 겪는 공포와 수탈은 비슷해 보인다.  나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만행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힘들게 한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뤼실의 집은 부유한 가정으로 남편 가스통이 전쟁에 나갔고, 시어머니는 매월 소작농들의 집세를 받으며 살아가는 강한 여성이다. 심지어 피난민을 소작농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집세를 두배나 올려 받고, 소작농은 헛간으로 쫓겨난다. 그런 뤼실의 집에 부루노 중위가 배정받는다. 

 

  중위와 뤼실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독일의 병사도 한 인간으로 보이는 장면이 있다. 남편을 전쟁터에 내 보낸 뤼실, 형제들이 전쟁터로 나갔고, 한 형제는 노르망디에서 죽었으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군인 부루노.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국가 권력이지만 전쟁에 희생되는 것은 젊은 병사와 힘없는 여성, 아이, 노인이다. 

"형제들은 모두 전쟁에 나갔어요. 폴란드, 노르망디, 아프리카로. 질문은 상황을 어렵게 만들 뿐이에요."

"전쟁을 지지하나요?"

"공동체 정신을 지지한다고 치죠. 모두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개개인의 행동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당신을 보면 의미 있어 보이던데요."

"언제 날 봤죠?"......."나랑 공통점을 가진 사람은 당신이 유일해요."

 

영화 초반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소작농 셀렌느의 말이다. 

"우리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을 보려면 전쟁을 하면 된다. "

독일군 부대가 들어온 후에 사람들은 편지를 써서 서로를 고발하는 고발장을 독일군에게 자발적으로 보낸다. 거기에는 뤼실의 남편 가스통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가스통은 결혼 전에 사귀던 여성이 있고, 심지어 시몬이라는 딸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이 고발장에 등장한다. 서로가 서로를 고발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건지고자 함이다. 

'블랑은 자신 나이의 절반밖에 안되는 여성과 성관계를 7개월동안 가졌다. 체포해야 한다. '

'뒤부아는 암시장에서 음식거래를 했다.'

'아카르는 공산주의자, 거짓말쟁이, 동성애자다.'

'피난민은 카톨릭 행세를 했으나 더러운 유대인이다.'

 

권리를 보장하고, 주민을 보호한다던 독일군은 머무는 집의 여성을 탐한다. 그런 독일군을 어쩌지 못하는 남편이 있는 반면, 전쟁터에 남편을 내 보내고도 독일 병사와 사랑을 나누는 부인도 있다. 

"저 사람들은 우릴 집에서 쫓아내지는 않아요. 우리 남자들은 저들보다 나을 게 없어요."라고 애써 변명하는 부인.

"전쟁에서 진 마당에 여자들까지 빼앗길 순 없어요." 부인을 지키고 싶은 남편의 말이다. 

"애초에 나라를 잘 지키지 그랬습니까?" 독일군인의 대답이다. 

 

  영화속에서 전쟁중에 상류 계층의 인사들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아보자. 

  페탱장군의 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자유지역인 리옹에서 지낸다. 아들이 노르망디에서 죽자 뷔시로 와서 독일군이 차지한 집의 물건들을 챙기고자 한다. 그 때 배신자로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 받던 뤼실이 페탱부인의 부탁을 받고 저택으로 가서 물건들을 가져다 준다. '의치 한 개, 만찬에 필요한 식기, 추억이 깃든 살림살이까지 내가 적들로부터 되찾아온 것이다. '그런 뤼실에게 페탱부인이 비꼬면서 하는 말이다. "잘했어요. 이 쓰레기들을 견뎌내는 배짱 하난 알아줘야겠네요."

  시장은 자신의 집에 배정된 중위를 멀리 떨어진 자신의 농장에 배정하게 해달라고 뇌물을 준다. 결국 자신의 집에는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 또 먹을 것이 떨어진 사람들이 시장의 창고에 와서 먹을 것을 훔쳐가자 부인은 브누아를 처리해 달라고 부탁한다. 

 

저자 이렌에게 독일군은 침략자인 동시에 그들과 다름없는 인간, 공포와 증오의 대상, 욕망의 대상, 전쟁의 도구인 동시에 희생자로 비쳐졌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피난을 온 안나라는 아이와 어머니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들은 소작농의 집에 두 배의 집세를 내고 산다. 바로 이 안나의 어머니가 이렌으로 오버랩된다. 

 

  <스윗 프랑세즈(Suite Française)>는 영화 전반을 아름다운 피아노곡으로 채워놓는다. 전쟁 중에 이렇게 낭만적인 노래를 작곡하는 군인이 있다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말이다.   5명의 병사들의 조준 사격으로도 죽지 않은 시장을 권총으로 처리하는 손으로 아름다운 곡을 작곡하고 피아노를 치다니...... 정상이 아니고서야 가능하지 않을 일로 보인다.  전쟁 후에도 병사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희생당한 사람들은 평생을 슬픔으로 살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대결을 벌인 전쟁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독일이 연합군의 공격으로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6월 30일까지 노르망디를 탈환한 시점으로 본다.

 

  전쟁같은 경쟁 사회의 금요일에 달콤한 프랑스의 일상을 기대한 예상을 깨고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기분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으로 가득 한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이 실제의 전쟁보다 낫다고 볼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가 더이상 국민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 러시아와 합의에 이르기를 바란다. 미국의 대통령의 중간 선거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연관 고리가 있다고 한다. 어떤 목적이든 전쟁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된다. 전쟁은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이다. 

 

'영화로 보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평] 미스 슬로운  (0) 2022.07.02
[영화평] 인생은 아름다워  (0) 2022.06.19
[영화평] 머니볼  (0) 2022.06.12
[영화평]스타트랙 비욘드  (0) 2022.06.06
[영화평] 닥터스트레인지2  (0) 2022.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