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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서평]봄에 나는 없었다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2. 1. 31. 20:09

 생각말고 할 일이 없을 때 나는 무엇을 알게 될까?

 

이 책은 추리소설의 대가로 알려진 아가 크리스티가 필명 ‘매리 웨스트메콧’으로 저술한 여섯 편의 소설 중 하나다.

 

조앤 스쿠다모어는 중년 여성이다. 시골이지만 남편은 법률사무소를 연 변호사이고 두 딸과 아들을 두었지만 모두들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그 비결은 자신이 가정을 잘 돌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지역사회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던 사람이다. 큰딸이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중병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바그다드를 다녀온다. 경로는 영국 크레이민스터-런던-터키 이스탄불-알레프-텔 아부 하미드-키르쿠크-이라크 바그다드로 이어진다.

 

바그다드에서 키르쿠크를 지나 자동차로 텔 아부 하미드역에 도착했으나 기차가 홍수로 끊기고 사막 한가운데 숙소만 덩그러니 놓인 곳에서 고립이 된다. 사방은 사막이고, 기차는 언제 들어올지 기약이 없으며, 방안은 어둡고 덥다. 식사는 너무 익힌 달걀 요리와 통조림 콩, 살구, 복숭아 등뿐이다. 숙소에는 인도인 지배인과 아랍 소년, 그리고 요리사가 전부다. 숙소 옆에 철조망이 둘러쳐진 기차역이 있을 뿐 보이는 건 모두 사막과 햇빛뿐이다. 그런 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책 읽기, 편지쓰기, 생각하기다.

그동안 완전해 보였던 가족들에게서 분리된 채 생각해 보는 가족들은 모두 자신을 밀어내는 모습을 보여왔지만, 조앤은 개의치 않고 당당하고 명랑하게 지내왔다는 걸 깨닫는다. 큰딸 바버라는 엄마를 피해 멀리 이라크에 있는 남편과 결혼해서 떠났다. 둘째 딸 에이브릴은 늘 엄마를 자극했다. “아빠는 돈을 버는데 엄마는 왜 돈을 안 벌어요?” “난 살림을 하지.” “요리는 요리사가 하고, 살림은 가정부가 다 하잖아요,”이런 식이었다. 그러던 에이버릴도 결혼을 해서 런던에 살고 있다. 아들 토미는 엄마의 반대에도 농업대학을 다녔고, 남아프리카에 가서 결혼해 오렌지농장을 하면서 살고 있다.

남편 로드니는 사무실 창밖으로 소띠를 구경하고 농장을 운영하며 살고 싶어 하지만 조앤의 반대로 변호사 일에 파묻혀 살고 있다. 그런 로드니가 딸의 결혼을 반대하며 한 말은 조앤을 들으라고 한 말처럼 들렸다. “인간은 하고 싶은 일-타고난 일-을 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불행하고 성취감도 없이 사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거다.” 또 로드니는 늘 “불쌍한 우리 조앤”, “이상한 조앤” 등으로 조앤을 부르고, 자식들은 아빠와 더 친하며 하물며 하인들까지도 조앤보다는 남편을 더 좋아했다. 로드니는 조앤이 보기에 아름답지도, 젊지도 않고 되는 일도 없는 여자인 레슬리 셔스턴을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그들의 관계를 인정하기 싫었던 조앤은 애꿎은 머나 랜돌프를 끌어들여 남편을 좋아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다. 그런 일까지도 다 생각하게 하는 사막이 싫었지만 조앤은 사막에서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어서 돌아가 새 사람으로 살리라 하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돌아와 로드니를 보았을 때 모든 생각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막의 햇빛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이 되어 자신과 마주했던 기억은 이제 없다. 오로지 남편과 삶이 고스란히 다시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앤은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옮긴이는 말한다. “자기만족에 빠졌던 그녀는 사막이란 낯선 곳에서 진실을 마주하고 변화를 다짐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과 마주한 순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소설의 반전이자 애거서가 인간의 핵심을 꿰뚫는 대목이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진실을 알면서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 조앤이 유난히 어리석은 여인이라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조앤처럼 살아간다. 소설이 끝난 순간 ‘나를 보았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은 자신과 마주하기 싫어서 타인들과 어울리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자신과 마주 선다는 것만큼 무서운 일이 있을까?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묘사한 톨스토이가 이반일리치가 가족들과 분리되어 죽음과 마주하는 장면을 그릴 때 이반일리치는 너무나 두려워하고, 불안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태어나서 대부분의 시간을 타인과 함께 한다. 그러다 어떤 순간 사람들로부터 분리되면 우리는 자신과 마주하고 그 시간은 너무나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이 되는 것이다.

 

조앤은 자기 앞에 주어진 사막과 철철 넘쳐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삶과 주변 인물을 되돌아본다. 남에게 보여지는 삶을 잘사는 것으로 치부하고, 어려운 것은 피해가면서 쉬운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여지는 자신의 삶이 남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삶이었다는 깨달음은 자책과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그리고 가족들이 살고 싶은 삶을 응원하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현실의 문 앞에 선 순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 이야기는 처음에는 낯선 문체로 잘 읽히지 않는다. 다소 설명하는 듯한 문체라서 그렇다. 그러나 차츰 자신의 생각의 고리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하는 조앤의 모습은 때로 생각의 꼬리를 잘라버리기 위해 꿈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적응이 되어간다. 아마도 번역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제목이 ’봄에 나는 없었다.‘이다. 조앤의 6주간의 여행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싯구에서 따온 말이다. 조앤에게는 이 싯구가 어울린다. 이 싯구와 함께 등장하는 싯구가 있다.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으리.'이다. 마음으로 통했던 레슬리를 기억하는 로드니의 싯구다.

 

우리는 누구와 살고 있는가?

“난 알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 진실? 그게 진실이라는 걸 어떻게 알지?”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조앤의 여행길을 따라가 봤다. 1930년대는 일주일 걸렸지만 지금은 10시간이면 갈 수 있다.&amp;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