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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시 <구부러진 길> 본문

읽히는 시

이준관 시 <구부러진 길>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1. 8. 16. 23:50

한여름에 보는 눈길은 새롭다. 행주산성 올라가는 길이다.

 

 구부러진 길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시 전문-

 

 이 시는 광화문 글판에 실린 시다.

아스팔트 깔린 직선 도로는 거침없이 내달리는 자동차의 바퀴가 선호하는 길이다. 반면 나의 두 발은 고운 흙으로 다져져 매끈해진 길, 사람들이 오며 가며 만들어진 오솔길이 편하다.  산책길도 아스팔트 보다는 아파트 둘레로 난 둘레길, 연꽃이 핀 개천의 둘레길이 좋다. 제일 좋은 길은 낮은 언덕길이다. 나무가 있고, 숲이 있고,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길을 나는 좋아한다.

 시인은 구부러진 길에서 민들레와 감자 심는 사람과 저녁 무렵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릴 듯한 그 길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 길에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다. 그래서 그 구부러진 모퉁이마다 품을 수 있는 품이 넉넉한 길이 있다고 말한다. 산을 품고 길을 품고 구부러진 길이 이어진다. 끝도 없이 이어진다. 길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가끔 학생들이 하교하는 골목길을 돌아본다. 거기서 탱자가 초록을 머금고 커가는 걸 발견한다. 모퉁이에서는 키가 커서 보이지는 않지만 저  나무 위에서 향기롭게 꽃을 피우는 가죽나무를 발견할 때는 무척 반갑다. 이제 여름이 짙어져 접시꽃과 맨드라미 울타리, 울타리로 이어진 포도넝쿨에서 익어가는 초록빛에서 보라색으로 익어가는 집포도를 발견한다. 길은 구부러진 길이 볼 것이 많고, 사람도 구부러진 사람이 품이 넉넉하다.

 

모퉁이를 돌아나오면서 발견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을 알려면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다. 

나의 주변에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길처럼 돌고 돌아서

나도

여기서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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