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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신경숙의 소설 <리진>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0. 12. 29. 13:31

-이름의 주인으로 산다는 건

 

작가 신경숙은 1985년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풍금이 있던 자리』, 『외딴 방』, 『엄마를 부탁해』 등의 소설을 발표하였으며, 특히 『엄마를 부탁해』는 여러 나라에 출간될 만큼 큰 반향을 일으킨 소설이다. 주로 마음의 현존을 그려내는 현재형 묘사의 작가이고, 그것을 통해 90년대 문학의 한 흐름을 만들어낸 작가이다. 그런 작가가 느닷없이 역사소설을 발표한 것은 2000년 들어 김훈, 김영하, 황석영, 성석재, 전경린, 김별아 등의 작가들이 발표한 소설들과 함께 서사적인 지형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권, p314

장편소설 『리진』에서 작가는 19세기 말이라는 문제적 시대를 배경으로 조선의 궁궐에서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에 이르는 광대한 스케일의 여정을 따라가는 한편 밑바닥 서민층에서 귀족, 왕족, 상인과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다양한 군상을 선보이고 있다.

리진은 임금이 하사한 이름이다. 궁궐의 무희로 살면서 서나인으로 불린 여자는 임금의 여자다.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가 첫눈에 반해 인생을 함께 하기로 한다. 궁궐을 떠나기로 한 날 왕은 리진(李眞)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비로소 이름이 생긴 것이다.

-이름의 주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그 이름의 느낌이 생기는 게다. 네 이름을 부를 때면 은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아름답게 살라. -

-나는 개화된 세상에 나가보길 꿈꾸나 이 궁궐에서 한발짝도 옮기질 못할 처지이니 네가 부럽구나.-

왕비는 궁을 떠나는 리진에게 이렇게 말한다.

 

리진은 어릴 적 천애고아가 되어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왕비의 사랑을 받고, 또 아름답고 총명한 궁녀로 자라나 무희가 된다. 리진은 프랑스 외교관의 아내가 되고, 그를 중심으로 프랑스 공사 콜랭, 김옥균의 암살범이자 한말의 정객으로 프랑스 유학 생활을 하고 또 <춘향전>과 <심청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던 홍종우, 고아로 함께 자라나 악사가 된 강연, 딸처럼 리진을 아낀 왕비 명성왕후와 서씨 부인이 있다. 리진의 생애는 성균관 마을인 반촌에서 시작하여 궁중, 프랑스 공사관, 파리로 이어지고, 다시 조선의 궁궐 한복판에서 마무리된다.

 

작자가 역사 속에서 소설로 끌어낸 사건은 ‘을미사변’이다. 한 왕국의 왕비가 외국의 자객들의 손에 무참한 방식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비참한 사건인데, 제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 파장은 훨씬 대단한 것이다. -p325 프로이트의 화법에 의하면 여성들은 남성들의 전쟁터에 내걸린 내깃돈이다. 왕비의 시해 사건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끝나버렸고 이미 왕이 살아있더라도 시체가 되었음을, 왕뿐 아니라 국체의 수호자여야 할 세력들이 시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건인 것이다. -p326

 

작가 신경숙의 소설 <리진>은 1900년대 조선시대의 몰락 과정 속에서의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궁궐 속에서 이루어진 변화의 회오리, 열강 속에서 왕과 왕비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작가가 왜 주인공의 서사를 글로 쓰려고 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개항기 한국 사회와 천주교회>,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조선-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문명과 야만-타자의 시선으로 본 19세기 조선>, <먼 나라 꼬레>, <한국 복식사> 등 참고문헌을 보더라도 작가가 <리진>을 탄생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영역이 아닌 역사소설에 큰 뜻을 품고 시도했다는 점이 새롭다.

 

이 책은 작가 신경숙의 문체를 좋아하는 분에게 추천드린다. 그의 문체 속에서 보석같은 문장들을 대다수 발견하였다. 포스트잇에 메모하였다가 여기에 쏟아 놓아 본다.

 

 

-오래 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일수록 그를 변화시키려 해선 안된다. -p35

세상의 물이 모두 바다로 밀려들어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p33

헤어진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은 불안으로 인해 산만해진 마음을 달래준다.

외로운 이에게 어린애의 체취는 따뜻한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같다. -p52

연민이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p44

물은 생긴대로 퍼 담을 수도 있고 따를 수도 있다. 어디에나 고일 수도 있고, 어디로든 흘러갈 수도 있다. 어떻게도 그 본성을 변화시켜 놓을 수 없으니 그것이 물의 힘이다.

 

-풍랑을 견딘 배만이 항구에 닿는다. 아침 장미는 천 가지 희망을 가지고 핀다고 했던가.

청춘 시절엔 미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인간을 변화시킨다.

백단향! 자기 둥치를 찍어내리는 도끼날에 조차 향기를 남기는 나무가 있으니 백단향이다.

새벽은 영혼의 시간이다.

모두 함께 수련하다 보면 옆사람의 영향을 받아 너만의 것이 덮여 버리기도 하는 것이 예능이니라.

완벽한 것은 보는 사람을 압도해 밀어내는 법

 

-눈 앞에 펼쳐지는 어떤 풍경은 숨어있는 마음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물소리를 내지 않는 강이 깊은 법이다.

자신의 인생에 무관심하면 의망이 죽고, 다른 사람의 삶에 무관심하면 죄를 짓게 된다. -모파상-

멸시의 가장 완곡한 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ㄱ서이다.

그리운 것은 눈을 감아야만 보인다.

꿈을 이룬 자의 발걸음은 부지런하다.

 

-달콤한 꿀도 상처에 바르면 아픈 법이다.

열정이 앞서며 보지 못하는 것도 있다.

혼자 있는 사람의 뒷모습엔 하지 못한 말이 씌어있다. -157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희망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희망을 갖는 일보다 더 힘겹다.

오랜 벗을 대신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관용=자유=존중

불면은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고통을 준다.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