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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세월 본문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질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쌓인 사전은 삭제될 것이다. 침묵이 흐를 것이고 어떤 단어로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입을 열어도 '나는'도, '나'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계속해서 세상에 단어를 내놓을 것이다. 축제의 테이블을 둘러싼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저 단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며, 먼 세대의 이름 없는 다수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점점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아니 에르노-
저자 아니 에르노는 1940년 태어난 프랑스의 소설가로 202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세월>은 저자가 살아온 세월을 앨범의 사진을 한 장 씩 꺼내서 들여다보며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였는데 특이점이 많다. 차례가 없고 이야기는 수시로 이어졌다 끊기며 어느 부분을 읽어도 저자의 삶 속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글이 온통 한 꾸러미다. 형식도 없다. 문단도 제 각각이다. 그저 하고 싶은 말을 썼을 뿐이다. 그러나 시대를 통찰하는 저자의 시선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그 안에서 살아온 세월을 연대기처럼 꿰고 있다.
1968년 유럽이 자유운동으로 들끓었을 때 동북아시아인 한국까지는 그 여파가 오지 않았으니 글을 읽으며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TV가 가정에 도입되면서 가족간의 대화는 줄고, TV앞에 들어앉힌 남편은 야구, 축구에 열광하는 대신 잃어버린 이웃, 마을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낯익은 풍경이다. 또 '광고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떻게 가구를 갖춰야 하는지 보여주는 이 사회의 문화적인 코치였다. (152P), 어떤 광고든 돈, 섹스, 마약 중에 돈을 선택하세요라고 말했다. (293p)'는 저자의 서술에서는 적확하게 꿰뚫어 보는 시대적 통찰력에 놀라게 된다.
한편 자유분방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여성도 한국의 여성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거리가 멀어도 모든 지구에 같은 맥락으로 존재하는 여성의 고민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여행을 하고 혼자 호텔에 머문다는 생각이 그녀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 날마다 모든 것을 떠나 혼자가 되고 싶은 욕구와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렸다. 진짜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여성의 정체성>, <지배하에 있는 여성>을 보러갔다.(181p) ' 그리고 바야흐로 육체의 시대에 이른 지구촌의 풍경도 공감하기 충분하다. '우리 안에서 사고하는 것은 바로 육체였다. 희망, 사물에서 몸의 대화로 옮겨진 기대. 영속적인 젊음. 건강은 하나의 권리였고, 질병은 가능한 한 신속히 고쳐야 하는 부당한 것이었다. 지독한 것들과 죽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야 했다. (202p) 교육에 대해서는 어떤가? '우리는 <확실한 직업>과 돈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이 우선 그런 행복을 갖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219p) '는 저자의 서술은 한국의 2024년을 사는 부모들의 공통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저자가 자신의 글에 앞서서 덧붙인 두 분의 글이 저자의 글의 갈피를 말해준다.
우리는 다만 우리들의 역사를 가졌을 뿐이고, 그 역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그렇다. 우리는 잊힐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해 보이고 심각해 보이며, 버거운 결과로 보이는 것들, 바로 그것들이 잊히는. 더는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 우리는 언젠가 엄청나고 중요하게 여겨질 일이나 혹은 보잘 것없고 우습게 여겨질 일을 알지 못한다.(중략) 지금 우리가 우리의 몫이라고 받아들이는 오늘의 이 삶도 언젠가는 낯설고, 불편하고, 무지하며, 충분히 순수하지 못한 어떤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누가 알겠는가, 온당치 못한 것으로까지 여겨질지도. -안톤 체호프-
저자는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니면 쓰지 않는 철학을 갖고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책은 여성으로서 1940년에 태어나 2021년까지 자신이 겪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1970년 석유파동, 2001년 미국 쌍둥이빌딩 격추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과 자신의 일상들을 세월의 흐름대로 썼다. 마치 앨범을 보는 것처럼 독자에게 사진의 등장인물(저자)의 상황, 그 시대 배경 등을 설명한다. 우리가 지구촌에서 동시대를 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 사는 나와 프랑스에 사는 저자나 그리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는 걸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발견한다. 혹자는 저자가 지나치게 솔직하게 섹스에 대해 서술하고 있어서 야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조차도 삶의 일부이기도 하고 젊은 날에는 전부가 되기도 하고 또 현대사회에서는 육체에 강력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바 우리들의 삶이지만 터부시 하던 내용을 저자가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고 본다. 서사가 엮여있지 않으니 지루하기도 하고 맥락을 수시로 놓치기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저자의 시대에 대한 통찰력을 거쳐 나온 단 한 줄의 글을 발견하는 소소한 기쁨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권한다면 아마 이 책은 오래 읽어야 할 책일 것이다. 저자의 나이가 현재 83세인만큼 글의 내용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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