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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시를 잊은 그대에게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3. 2. 26. 15:28

 묵은 앨범에서 발견한 한 장의 사진 같은 시가 인생을 담고 있었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러운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 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 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선암산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꼴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그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나리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국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김훈, <자전거 여행1>-

  문장이 짧기로 유명한 김훈작가도 봄 꽃이 피고, 지는 장면에서는 이토록 길게 서술을 했다. 꽃은 어느 계절이나 사람의 시선을 붙잡고 설레게 한다. 꽃이 피는 장면만큼이나 꽃이 지는 풍경도 좋은 글감이 된다. 진화심리학자는 사람의 생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꽃에 왜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행복해하는 지를 아직 밝히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꽃을 대지의 웃음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겠다.  무뚝뚝한 남자의 마음도 사로잡아 달리던 자전거를 멈추고 꽃그늘 아래서 서성이게 하는 이유는 때로 쉬어감이 필요하다는 단순한 진리일지도 모른다. 

 저자 정채찬은 국어선생님들의 선생님이다. 한양대학교 교수로 <문화혼융의 시 읽기> 강좌로 최우수 교양 과목에 선정되었다. 저자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다. " 

  저자는 유행가 가사,  시인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내어 인생에 빗대서 설명한다.  어디든 인생이 담기지 않은 노랫말이 없고,  인생을 담지 않은 시구가 없다.  그 노래와 시를 이어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 낸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정처 없이 흘러간다(최희준, <하숙생>중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중에서) 누군가에게는 나그네 길이라서 돌아갈 곳이 없어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소풍이니 돌아가면 반겨줄 누군가가 있다. (257p)

   낡은 필름 같은 눈이 내린다/이 길을 자꾸 가면 옛날로나 돌아갈 듯이/등불이 정다웁다/내리는 눈발이 속삭어린다/옛날로 가자 옛날로 가자(김광균, <장곡천정에 오는 눈>중에서-(272p), 한줄기 빛도 없이 향기도 없이/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김광균, <설야>중에서) 눈이 내리는 밤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요즘이야 자동차 운전이 필수인지라 눈이 내리면 차가 밀리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밤에 눈이 내리면 아침 출근길을 걱정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지만 감수성을 자극하는 소재 중 으뜸이 바로 밤눈이 아닐까 한다. 밤에 눈이 내리면 그 눈을 맞고 어디든 걸어갈 듯이 가로등 아래를 서성이던 젊은 날의 낭만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설렐 일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숨통 트일만한 테마를 담고 있다. 사랑, 별, 이별, 눈물, 편지, 기다림, 노래, 아버지, 행복, 나그네, 눈, 반항 등을 12개의 주제로 나누고 시와 노래, 사람 사는 이야기를 묶어냈다.  책 표지에는 흰 바탕에 시가 비가 되어 내린다. 책 속과 연결되는 책표지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절에 시집을 사서 읽은 사람이라면 익숙함에 한 번,  그리움에 또 한 번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잠 안 오는 밤에 읽으면 더 좋을 책이다.  잠 자기 전에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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