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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나의 문어 선생님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2. 3. 1. 21:05

바다에서 찾은 <나는 자연인이다>

 문어가 주인공에게 배울 게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고 한다. 

 

나는 왜 주인공이 바다의 문어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문어 선생님의 제자의 이름은 크레이크 포스터다. 고향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웨스턴 케이프주, 폭풍의 곶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다시마 숲이 있고, 조간대로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큰 곳이다.  대서양의 막대한 영향력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크레이그는 고향을 떠나 촬영하는 일을 직업으로 한다.  그러던 중 20년 전 칼라하리 사막에서 <그레이트 댄스>라는 제목으로 사냥꾼이야기를 촬영한다.  사냥꾼이 보이지 않는 동물의 흔적들을 추적하여 사냥감을 찾아내는 과정을 촬영하던 중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2년전에는 해외에서 일하는 것에 지친 나머지 몇 달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일의 도구인 카메라에 싫증을 느낀다.  삶에 목적의식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지만 그에게는 어린 자식 톰이 있다.  그러나 그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는 힘든 상태였다. 

 

 그래서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크레이그는 변화를 위해서 대서양으로 가자!라고  생각하고 고향의 바다로 돌아갔다. 

 

  하지만 바다는 차가웠다. 수영하기 두려웠다. 수온은 8-9도, 숨이 멎을 만큼 춥다. 긴장을 풀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10분-15분 후에 아름다운 시간이 온다.  추위 때문에 두뇌회전을 빨라지고 온몸의 감각이 살아난다. 물에 적응할수록 편안해진다. 1년 후가 되면 그는 이제 그 추위를 갈망하게 된다. 바다와의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 잠수복을 벗었다. 그렇게 바다에 적응하고,  관찰자가 되자 촬영에 대한 의욕이 생겼다. 

 

  관찰자로 바다에 대한 애정이 생기자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 만난 동물이 문어다. 그는 문어를 매일 들여다보기로 한다. 그는 문어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문어에 대해 알아간다. 문어의 종류는 왜문어다. 개와 고양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으며, 인지력의 2/3는 바깥쪽 팔에서 나온다. 빨판은 2천 개이며 각각을 움직일 수 있다.

 

 크레이그가 문어에 관심을 갖고 관찰자가 되고, 바다의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지내는 시간이 크레이그에게는 평온함과 호기심, 자연의 일부분임을 발견하는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 된다.  문어는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제 크레이그는 아들과 함께 바다로 간다. 다시마 숲을 헤엄치고, 관찰자가 되어 자연의 변화를 몸으로 겪는다.  

 

 왜 도시의 사람들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볼까?  아파트와 문명사회가 자연과의 단절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신도시는 더욱 심각하다.  도로와 도로의 폭은 50m는 족히 넘고,  아파트를 넘어서 자연으로 가 닿기에는 너무나 멀게 설계되어 있다.  편안함 대신에 자연과 이웃은 포기해야 한다.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TV보기, 휴대전화로 연결하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회귀본능이 시작되는 50대가 넘어서면 <나는 자연인이다>를 선호하지 않을까?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꾸지만 가 닿지 못하는 여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셈이다.

 

 크레이그는 모든 생명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야생생물이 얼마나 유약한가를 이해하고,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유약한가를 알았다고 말한다.  미디어 회사들은 앞다투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자신들이 만든 세계로 채우기를 바라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에 바쁘다. 이제 가상세계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분별 있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인간 소외는 가속화될 것이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미디어 회사가 만들어내는 온갖 편리함에서 한발 멀어지는 것,  필요한 부분만 이용하는 것이다.  

 

 어린 문어가 바다에서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듯이 사람들도 자기 앞의 생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숙명이다.

성공한 삶이 아니라 살아내는 삶이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