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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최진석 <경계에 흐르다>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1. 4. 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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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흐르다

백발의 짧은 머리를 한 철학자 최진석은 대개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걸치고 강연에 나선다. 노자와 장자를 ‘현대의 철학자’로 우리 시대에 소환하며, 이념과 신념에 포박된 무거운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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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방법으로 살아라,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지.

 

 

칼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얼치기 철학은 현실을 떠나지만, 진정한 철학은 현실로 돌아온다.

 

장자의 소요유(小遙遊)

우주의 북쪽 바다에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았는데,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되었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힘차게 날아올라 날개를 펼치면 마치 하늘 가득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가 크게 출렁거려 대풍(大風)을 일으킬 때, 그 기운을 타고, 천지(天池)라고 불리는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p.20

 

장자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사는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천리마가 벽의 갈라진 틈새를 내달리며 지나치는 순간 정도다. 홀연할 따름이다. (知北遊)(p.21)

 

장자는 매우 두꺼운 책이다. 그 안에서 장자가 한 많은 얘기들은 인간의 무한확장을 도모한다.

소요유는 절대자유다.

해와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 만물의 흐름과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혼돈의 상태 그대로 두고 귀천 같은 것은 구별도 하지 않는다.

 

교육방법

노자는 "성인(聖人)은 자연의 운행과 존재 형식을 모델로 삼는 가장 높은 인격 수준이다. 성인은 불언지교(不言支敎)를 행한다. 불언지교는 무위(無爲)적 행위의 한 유형으로 침묵의 가르침이 아니라 언(言)은 개념적 규정. 정의를 내리는 방식의 언어활동을 의미한다.

"너 지금 쓰레기 버렸어."

"너, 지금 너하고 똑같은 다른 사람을 때렸어."

'너 단추 풀어졌다."

라고 말하여 학생 스스로 자기 행위를 결정하도록 '사실'을 알게 하고 스스로 교정하는 기회를 갖게 해 주는 방식이다.

 

상대방을 움직이는 감화력

안회가 묻자 공자가 "심재(心齋)하라." 마음을 통일하라는 말이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듣도록 하라."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듣는 일은 갇힌 틀이 작용한다. 기의 단계는 이념, 가치 개입 이전의 단계이다. )

천지를 관통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덕(德)이다.

 

덕의 활동성을 따르는 사람은 '참사람'이다.

오묘한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고, 소리없는 고요속에서 소리를 듣는다.

오묘한 어둠 속에서 홀로 밝은 빛을 보고

아무 소리 없는 곳에서 홀로 조화로운 소리를 듣는다.

 

이제 알겠다.

위대한 고전들은 다 자기 자신처럼 산 사람들이 남긴 결과라는 것을.

그렇다면 위대함은 다 자기 자신으로 산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겠다. (p. 121)

 

사유의 높이과 넓이는 삶의 높이와 넓이를 결정한다. 세계를 관리하는 넓이과 높이를 결정한다. (p.162)

 

과거는 목적이 아니라 가벼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낫다.

과거의 논의로 현재를 채우고 과거의 방법으로 현재의 문제를 풀려고 하면 수주대토(守主待兎)한 농부처럼 웃음거리가 된다.

그런데 바보들은 언제나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도 계속 같은 방법을 쓴다.

 

"눈은 게으르지만 손발은 부지런한 것이다. "

 

눈대중이나 계산 속에 빠져서는 도약같은 것은 아예 꿈조차 꾸지 못한다.

무모함을 통과하지 않고 빚어진 새로운 역사는 없다. (p.171)

 

 

최진석교수는 서강대교수로 도가철학을 전공한 분이다. 

건명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기도 한 그는 고향 함평으로 내려가 호접몽가를 짓고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최진석의 글과 말은 힘이 있다. 명쾌하다.  글과 말이 일치함을 그의 말을 들으면 알 수 있다. 그의 삶 또한 글과 말을 따라가고 있는지, 삶이 말과 글을 이끄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말과 글에서 에너지를 느낀다. 살아있음을 안다.

요즘같은 시대에 철학을 말하는 용기를 가진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