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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글쓰기-물.흙.불.바람

두 번째 차를 보내며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1. 1. 26. 20:41

자동차를 처음 구입한 것은 1995년 2월이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그다음 해에 차를 샀다.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고,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구입한 차는 세피아 1세대 군청색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부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출퇴근을 하기 위해서 2003년 두 번째로 구입한 차가 중고 트라제 XG다. 세피아를 16년 타고나니 차가 주행 중에 멈춰 버렸다. 그래서 세 번째로 구입한 차가 지금 타고 있는 차다.

 

  기아 세피아는 94년에 딸아이가 백일 무렵에 차를 구입하려고 운전학원에 다닌 후에 거의 6년 정도 운전을 안 하다가 지금 사는 곳으로 내려오면서 처음 운전하게 된 차다. 두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함께 도서관을 다닌 차다. 이사 오기 전에는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현대미술관, 서울랜드까지 자전거를 싣고 가서 벚꽃 핀 길에서 자전거를 타게 해 주었다. 두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함께 했던 차이다. 어느 해 눈이 많이 온 설 명절에는 고향에서 출발해서 집까지 14시간이 걸린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가족 넷이서 함께 지낸 차가 바로 세피아다.

 

트라제 XG도 22만 km를 타고나니 제 몫을 다한 셈이다. 노후 경유차로 분류되어 서울을 진입할 수 없게 되었다. 저감장치를 달아야 하지만 차가 낡아서 교체해야 할 시기가 되었기도 했거니와 저감장치를 신청했으나 만년 대기 중이다. 비상저감조치라도 발령되면 꼼짝없이 쓸 수가 없을 처지가 되었다. 

 

  트라제는 구입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1번 국도에서 신호 대기 중에 뒤에서 들이 받는 사고가 났었다. 온 가족이 병원에 가서 X-RAY를 찍었지만 다행히 별 이상은 없었고, 구입한 지 얼마 안 되어 뒷 범퍼를 교체했다. 병원에 입원할 생각도 못 했고, 범퍼만 교체하고 말았지만 나중에 뒷바퀴 쪽의 차체가 삭아서 녹이 슬기도 하는 등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사람이 많이 안 다친 게 다행이라고 했건만 고스란히 차에 흔적이 남았다.

 

  트라제XG는 9인승이다. 그래서 고속도로 버스 주행 차선을 이용할 수 있다. 단 6명 이상 탔을 경우에 한해서다. 트라제는 차가 크니 여럿이 탈 수 있어서 좋았다. 큰 찜통을 차에 싣고 동해 주문진 수산시장에서 털게를 사 가지고 리조트 가스 불위에 올리고 쪄서 먹으면 정말 맛있었다. 지금은 다들 귀찮아서 밖에서 밥을 사 먹지만 10년 전만 해도 리조트에 갈 때 다들 양 손에 바리바리 음식을 준비해 가곤 했었다.

 

​   트라제는 차체가 높다. 그래서 높은 산에 오를 때 승용차보다 바람이 많이 와 닿는다. 대관령을 넘을 때 바람을 고스란히 느낀다. 차가 휘청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느 해 겨울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강원도 속초 리조트에 놀러 갔다. 물놀이를 하기로 했는데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대관령을 넘어 돌아갈 일이 걱정이라 물놀이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짐을 꾸렸다. 아이들은 물놀이를 못해 아우성이었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왜 그때는 하룻밤 더 자고 놀고 올 생각을 못했을까? 그때로 돌아간다면 실컷 물놀이를 하고 며칠 더 묵었다가 돌아올 텐데...... 후회되는 일 중 하나다.

 

  인천 공항으로 딸아이 유학 가는 길에 짐을 싣고 갈 때도 트라제를 가지고 갔다. 영종대교도 바람이 심하게 불면 차가 심하게 흔들린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등에 식은땀이 난다.  인천쪽으로 내려와 바닥에 안착할 때까지 조바심이 난다. 나만 그런가? 겨울 영종대교는 피하고 싶은 코스였다. 

 

  미국은 23KG을 가지고 갈 수 있다고 해서 트라제에 짐가방을 싣고 갔다. 배웅하는 가족까지 넷이 타고도 짐가방을 실을 수 있으니 트라제가 용이하다.  샴푸를 넣었다 빼고, 체중에 짐가방을 올렸다 내렸다, 집에서 짐을 싸고 나설 때부터 혹시 통과를 못하면 무얼 뺄지를 고민했었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짐을 부치고 딸아이를 보내고 돌아올 때도 트라제와 함께 였다. 한 학기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는 딸아이를 데리러 갈 때도 트라제와 함께 였다.

 

   오늘 저녁 먹으러 트라제를 타고 다녀왔다. 어제 새 차가 나왔지만 트라제 폐차 지원금을 기다리고 있는지라 대리점 지하주차장에 두고 왔다. 며칠 후면 폐차할 트라제를 타니 감회가 새롭다. 트라제 안에 있는 CD를 빼서 들고 나오는데 정이 많이 들어서 자꾸 뒤돌아 보게 된다. 햇수로만 18년을 함께 한 차다.  한동안 트라제 생각이 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