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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많이 신고하면서, 왜 덜 행복해졌을까?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6. 5. 15. 16:50

민원공화국, 교사와 의사를 무너뜨리다: 신뢰의 파산 보고서

  밤늦은 시간이 아니라도 학부모 전화에 교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내려앉는다. 응급실 의사는 보호자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진료보다 설명과 방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교사와 의사를 향한 과도한 민원은 단순한 불만 제기의 영역을 훌쩍 넘어버렸다. 현장에서는 이 현실을 '민원공화국'이라는 씁쓸한 이름으로 부른다. 병원의 '응급실 뺑뺑이'와 '현장체험학습'과 '운동회'가 사라진 학교의 상황은 '민원공화국'이 만들어 낸 자화상이다. 


1. "구더기 무서워 장독 깨나"… 멈춰버린 교육 현장

    현장체험학습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민원공화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공청회 현장에서는 사고가 생기면 모든 책임이 교사 개인에게 돌아오는 구조에 항의하며 체험학습 포기 선언이 잇따랐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독을 깨야 하느냐"는 말 한마디에 현장 교사들의 절박함이 담겨 있다. 교사도 다 알고 있다. 현장체험학습을 하면 아이들이 즐거워하고, 학습효과도 뛰어나다는 것을. 그러나 이제 하지 않는다. 하지 못한다. 

  숫자로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2025년 국민신문고 민원 접수 건수는 연간 1,500만 건을 넘어서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국민권익위원회, 2025). 그중에서도 교육 분야에서 전문가 판단에 불복하는 '보복성·반복성' 민원은 전년 대비 22%나 늘었다(국민권익위원회 민원정보분석시스템). 민원이 교육 활동 자체를 옥죄는 악순환이 이미 시작된 셈이다.


2. 교실은 교육보다 방어가 먼저가 되었다

  요즘 교사들은 생활지도보다 '증거 확보'에 더 신경을 쓴다고 말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설문 결과, 교사 10명 중 9명(92.0%)이 학부모 민원과 교권 침해로 인해 "교직에 대한 열정이 줄었다"라고 답했다(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제43회 스승의 날 기념 교원 인식 설문조사). 숫자지만, 숫자로만 읽히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는 결국 젊은 교사들의 이탈로 이어지고 있다. 임용 후 5년이 채 되지 않아 학교를 떠난 초·중·고 교사는 최근 1년간 589명으로, 전년보다 25.3% 늘었다(교육부·종로학원, 2023–2024 근속연수별 퇴직 교원 현황). 교사가 "오해하실까 봐 기록을 남깁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 우리가 바라던 교육의 모습은 조용히 사라진다. 자신의 말 한마디마다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 교사들에게 교육을 바라는 것은 가혹한 일이 아니겠는가? 


3. 응급실, 살리는 마음보다 고소당할 두려움이 앞선다

  의료 현장도 다르지 않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데이터에 따르면, 응급의학과 및 소아청소년과 의료진의 PTSD·우울증 관련 진료 청구 건수는 최근 3년 사이 45%나 늘었다(국민건강보험공단, 보건의료인력 정신건강 실태 조사). 환자를 살린 기쁨보다 '오늘은 민원이 없었다'는 안도감을 먼저 느껴야 하는 현실, 이것이 지금 응급실의 민낯이다.

  '응급실 뺑뺑이'는 의사의 잘못이 아니었다.  내과 전공의가 응급실 당직을 하는 도중에 급하게 외과 수술을 하게 되면 전공 과가 아닌 영역의 수술을 실시한 후에 혹시 모를 보호자의 소송을 감당할 준비가 먼저여야 한다.  그런 판례가 의사들이 응급실에서 환자를 거부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인력난으로 돌아온다. 2025년 상반기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율은 26%에 그쳤고, 응급의학과 역시 매년 지원율이 내려앉으며 의료 공백이 현실이 되고 있다(보건복지부, 2024–2025 전공의 모집 결과). 악순환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진행 중이다.


4. 민원공화국의 본질: 책임은 무겁게, 권한은 없게

  우리 사회는 전문가에게 '100% 무결점의 결과'를 요구하면서, 정작 그들의 판단은 쉽게 의심한다. 교사에게는 아이의 미래를, 의사에게는 생사의 결과를 온전히 책임지라 하지만 — 교육도, 의료도, 결국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완벽한 통제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OECD의 '2023 정부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의 사회적 신뢰도는 중하위권에 머물렀다(OECD, Government at a Glance 2023). 갈등이 생기면 대화보다 신고가 먼저 떠오르는 사회, 그 배경이 이 숫자 안에 담겨 있다. 책임은 무겁고 권한은 없는 구조 속에서 전문가는 방어적으로 변하고, 시스템 전체가 서서히 굳어간다.


5. 시민성의 회복: 신뢰 없이는 미래도 없다

  민원공화국은 제도 정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전문가를 '불만의 출구'가 아닌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동료로 바라보는 시선의 회복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든 신고하라"는 분노의 출구가 아니라,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갈등을 함께 풀어가는 '시민성(Civility)'이다.

  동시에, 민원 시스템 자체에 대한 재설계도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국민신문고는 시민의 목소리를 행정에 전달하는 소중한 통로다. 하지만 지금처럼 동일한 내용의 반복 민원이나 근거 없는 보복성 민원까지 아무런 제한 없이 접수되는 구조는, 오히려 제도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누구나 민원을 낼 수 있다'는 권리는 지켜져야 하지만, '같은 민원을 반복해서 제기하거나 명백한 악의가 담긴 민원은 걸러낼 수 있다'는 거름망도 함께 있어야 한다. 접수 단계에서의 유사 민원 자동 분류, 반복 민원에 대한 처리 기준 명확화, 악의적 민원에 대한 제도적 제재 — 이런 장치들이 갖춰질 때, 민원 제도는 비로소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민원이 많아진다고 시민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믿지 못해 각자도생하는 사회로 조금씩 밀려가고 있다는 신호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바닥나기 전에, 우리는 '민원' 뒤에 가려진 '사람'의 얼굴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 

 

  소졸화(小卒化, 개인주의)로 나만 작아진 것 같은 두려움에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만든 민원공화국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의사, 교사는 사회에서 전문가로 인정하는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다. 전문가가 민원에 시달린다면 그 사회는 미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