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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약용의 고해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3. 6. 1. 23:25

다산이 아닌 인간 정약용의 삶을 들여다본다
정약용(1762~1836)은 어떤 사람일까? 정조의 지시로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데 쓰인 거중기를 만든 사람 또는 목민심서를 쓴 사람 정도로만 역사 공부를 했을 뿐 그저 많은 조선시대의 선비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관심 있는 만큼 알게 된다. 지난 5월 10일 강진청렴연수원, 다산초당, 백련사 등을 다녀온 이후로 '정약용'은 항상 책상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작년 가을에 샀다가 순서를 미뤄놓았던 책 <정약용의 고해>에서 다시 정약용을 만난다.
저자 신창호는 고전학자이자 교육학자로 고전을 오늘날의 시선으로 되짚어보고 지금 여기에 적용하려는 저술 작업에 열정을 쏟고 있으며 고전과 인문학 강의도 진행한다. <일생에 한 번은 논어를 써라>등 20여 종의 책을 썼다. 저자는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낯섦'이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다산 정약용'이라고 부르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저술을 집대성하여 '여유당전서'라 명명했고, <자찬묘지명>에서 다산에서의 삶은 간략하게 기록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나이 예순에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에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를 들여다보려고 했다.
'정약용은 천주교에 매력을 느낀 학자일까? 성리학을 거부한 반주자학자일까? 서학까지 포용하며 근대를 지향한 진보적인 지식인일까? 이전의 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사상가일까?'(7p)하는 의문들 속에 정약용이 있다는 것은 세간에 그의 진면목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는 '고해(告解)'라고 해석하고 정약용이 스스로에게 고백과 용서를 담아 쓴 <자찬묘지명>에 입각하여 인간 정약용의 마음을 헤아린다. '고해(告解)'는 고해성사(告解聖事)의 고해다. 19년을 유배지에서 지내고 이후 18년을 고향에서 살았지만 생의 절반을 죄인으로 살았던 정약용은 스스로도 "나는 죄인이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뉘우침으로 점철되었다."(10p)고 말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어릴 적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20년 동안 세속의 길에 빠져 다시 선왕의 훌륭한 정치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여가를 얻게 되었다.'(135p)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천주교에 입문한 정약종(형), 이승훈(자부), 황사영(질부) 등이 죽임을 당한 것에 비하면 정약전(형)과 정약용의 유배는 크게 감형한 결과였다. 그 여가에서 정약용은 머물러 있지 않고 <논어>, <맹자>, <주역>, <대학> 등의 책들을 다시 읽고 학자로서의 견해를 밝혔으며, 자신의 학문으로 재탄생시킴과 동시에 국가 경영과 백성을 다스림, 범죄와 재판, 의학까지 섭렵하여 집대성했고 저술로 남겼다. 방대한 영역에 놀라고, 엄청한 분량의 창작물에 놀란다. 정약용이 서학과 천주학을 받아들인 것과 별개로 유배지에서 유학에 집착했던 대목은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순수한 학문의 발로였는지 천주교에 심취하여 세상을 바꾸려 했다는 죄를 뒤집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