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쓰기

[서평]어느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3. 3. 4. 21:49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살림'을 선택한 의사의 우울증 극복기

    '30년 전의 옛 일을 떠올렸건만 내 안에서 뜨겁고 축축한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트리폴리(레바논)에서 총소리를 들으며 나는 참으로 길었던 어린 시절의 그 밤을 떠올렸다. 오래 부정했지만 내 속에 아이가 있었다. 존재를 부정할수록 그 아이는 힘이 강해져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는 했다. 불편한 감정이 느껴지면 누구에겐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로부터는 도망쳤다. 성장을 거부하는 아이 앞에서 나는 너무나 무력했다. (139p) 저자 정상훈은 의대를 졸업했지만 돈 버는 의사 일을 뒤로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다. 국경 없는 의사회를 통해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에라리온 등지에서 전염병과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날아갔다. 서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아르메니아에서는 '다재내성 결핵' 환자를 치료했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했으나 결국 러시아가 세운 공장들이 멈춰서는 바람에 실업률은 20%에 육박하니 젊은이들은 러시아로 돈을 벌러 가서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병에 걸려 돌아왔다. 의사도 어쩔 수 없는 가난의 문제 앞에서 저자는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의 답을 찾으려 했다.  내전이 한창이던 레바논에서는 시리아 난민을 위한 진료소에서 근무하면서 이슬람의 시아파와 수니파의 문제와 미국과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열강들이 그 종교문제를 부추기고 있어 1천 년 이상 이어온 종교 분쟁은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저자는 자신이 한국에 두고 온 엄마와 가족을 떠올렸다.  그리고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는 죽음의 병이라 불리는 치사율 50~90%인 에볼라 바이러스 창궐 지역으로 날아가 구호활동을 벌였다. 삶의 문제를 안고 날아간 그곳에서 '살리는 일'을 하고 돌아와 자신의 소년 시절과 현실을 직면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 

  저자 정상훈의 이야기는 진솔하고, 처절하다.  우울증을 물려받은 엄마에게 곱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아들, 그 아들을 바라보는 게 인생의 낙이었던 엄마는 치매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제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혔던 우울의 그늘을 걷어내고 두려움을 마주할 용기를 얻은 저자의 말하기가 바로 이 책이다. 세상은 가까이 다가가야 보이는 것을 숨겨 놓았다.(89p) 그러나 저자는 '구호활동을 하고 돌아와 협력이 공포를 이긴다.(102p)', '아는 것이 언제나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106p), '아픔은 말이나 글로 배울 수 없다.(119p)', '세상은 분노로 움켜쥘 수가 없다.(112)'는 경험에 의한 깨달음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연본 4억원을 내걸어도 지방 의료원에서 의사를 구하지 못했다는 뉴스가 나오는 시기에 저자와 같은 의사가 있다니 경이롭고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희망을 만드는 사람, 의사 정상훈의 길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