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3. 2. 8. 17:24
구복자비필고 (久伏者飛必高) 개선자 사독조(開先者謝獨早)
오랫동안 엎드려 있던 것이 한 번 날기 시작하면 반드시 높이 날며, 일찍 핀 것은 홀로 일찍 시드는 법이다.
이 것을 안다면 발을 잘못 디뎌 허둥댈 걱정이 없을 것이며, 조급한 마음도 사라질 것이다.
-채근담-
<평택시 한 책 > 어린이 책 부문 선정 위원인 지인이 건넨 책 <너의 운명은>(한윤섭)의 134쪽에 나온 글귀가 '구복자비필고(久伏者飛必高)'다. 의병 활동으로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병에 가담한 아들의 이야기다. 이 책은 독립운동 당시 찍은 사진을 본 저자의 상상력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앳된 소년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가서 참여하고 그 사진 속에 당당히 선 모습을 보고 '저 아이는 왜 저기에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데서 시작했다. 질문은 다소 엉뚱하고 당황스럽게 한다. 기존의 틀을 깨기 위한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한 장의 사진이 책 한 권으로 나온 것은 저자의 시선이 어린 소년으로 꽂힌 데서 출발한다. 동화작가, 극작가로서 <봉주르, 뚜르>, <해리엇>, <서찰을 전하는 아이> 등의 동화와 소설 <찰스>, 희곡 <굿모닝파파>, <만적의 난>, <아! 바그다드>, <엄마! 지구랑 놀아요> 등을 썼다. 동화책에서 그림은 핫케익 위의 시럽처럼 빵의 본 맛을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린이 백대승은 그림책, 동화책에 그림을 그리는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서찰을 전하는 아이>, <나는 비단길로 간다>, <우리 집에 온 마고할미>등을 그렸다.
'만약 그날 선비를 보지 않았다면, 몸에 암흑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지금도 말없이 어디로 가는지,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른채, 그냥 어른이 되어 지게를 지었을 것이다. ' '그건 암흑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다.'(161쪽) 어린 소년이 일본이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과 함께 '암흑'이라는 말을 듣게 됨으로써 세상에 눈을 뜬다. 칼갈이노인으로부터 세상 돌아가는 걸 배우고, 안 부잣집처럼 부자가 되고 싶어 명당을 궁금해하고, 나무라도 해서 부자가 되는 길을 시작하고, 김초시를 만나 글을 배웠고, 드디어 아버지의 무덤을 알게 되었으며, 세상을 보는 뜨인 눈을 가진 소년이 암흑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독립군에 참여하는 과정이 채 2년이 걸리지 않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 일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준비해서 얻는 반전의 기회도 있지만 이렇게 의도하지 않게 흘러서 뜻하지 않는 곳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이 변화무쌍하다고 하지 않던가.
저자의 이야기에 일본군이 조선인들에게 어떤 패악을 저질렀는지는 단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 변화에 대응했을까를 각각의 인물들의 이야기로 잘 보여준다. 동화의 특성을 살려서 약간의 교훈도 실었고, 희망섞인 이야기도 들어 있다. 삶의 여정이 녹록지 않게 고단함을 어렴풋이라도 아이들이 알 수 있게 그려내고 있다.
요즘 원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약간의 의기소침하는 분위기를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구복자비필고(久伏者飛必高)를 보고 인생의 묘미를 다시 깨닫는다. 원하는 길로 가면 재미없는 인생이 아닌가. 기다려 보자. 어딘가 또 다른 길이 열릴 것이다. 하나의 창이 닫히면 하나의 창이 열리는 게 인생의 이치가 아니던가. 그걸 이 책을 통해 깨닫는다. 책은 내 안에 있던 또다른 깨달음의 씨앗을 싹트게 하는 구실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