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3. 1. 16. 21:51

  여수에서 여행 마무리 하는 날! 아침을 준비해 간 누룽지로 끓여 먹고 하멜등대로 가니 빨간 등대가 거북선대교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하멜등대 옆에는 기념관도 있어서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에 대해 알아볼 수도 있지만 향일암까지 26km를 가야 하니 하멜등대를 본 것으로 만족한다.  향일암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인데 다행히 날이 흐리고 이른 시간이라 주차장에 자리가 넉넉했다.  주차는 2시간 무료다.  향일암을 다녀온 지 꽤 지나서 그런지 절에 올라가는 계단이 바뀌었다.  아래쪽에 낮은 계단으로 2020년에 준공했다고 하는데 계단폭이 좁아서 오르기 힘들이 않다.  다만 주변에 숲조성을 하고 있어서 빈 땅이 드러나 아쉽다.  해수관음전, 천수관음전 등 화재 이후 재건해서 그런지 더 좁고 건물로 가득 찬 느낌인 데다 나무마다 금빛 소원지를 매달아 놓아 혼란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소원초를 사라,  기도하는데 돈을 내라는 등 계속해서 뭔가를 하라는 통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지만 동쪽부터 서쪽까지 확 열린 바다를 품에 안은 천혜의 요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내려오는 길을 따로 마련해 놓아서 그 길을 따라오니 예전에 올라가던 길을 계단이 아닌 시멘트길로 조성하여 차가 오갈 수 있게 만든 것으로 보였다. 

  향일암을 끝으로 여행을 마감하려다 아쉬움이 남아 구례 화엄사에 들르기로 했다. 화엄사는 지리산 아래 자리잡은 조계종 사찰로 연꽃 모양을 본떠 설계했다. 그 중심영역에 보제루가 있다. 보제루는 신도나 스님들의 강당 역할을 하는 장소로 보인다.  노스님이 옷을 여러 겹 입고 보이차를 종이컵에 담아 우리에게 건넨다.  접시에 쌀과자, 약과를 담아서 대접한다.  약과가 딱딱하게 굳어서 돌덩이처럼 단단하다.  날씨가 무척 추워지고 있어 발이 시릴 지경이지만 보제루에서 마신 보이차는 추위를 녹이기 충분하다.  그 외에도 부처님의 사리를 보존하는 사사자삼층석탑, 대웅전 앞의 석등,  마주 보고 똑같이 서있는 오 층 석탑 등 대다수가 문화재이고 국보다.  특이한 건 간장과 된장을 판매하고 있다는 점이다.  절음식이 건강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찾는 이들을 위해 판매를 하고 있나 보다. 화엄은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의미로 화엄경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절까지 5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라서 접근성이 기가 막히다.  절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끊임없이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기품이 있는 절이다.  속이 깊은 절이다. 

 

 화엄사에서 9km쯤 떨어진 곳에 사성암이라는 절이 있다. 화엄사의 말사(末寺)로 구례읍 오산(鰲山) 산등성이에 있다. 서기 544년에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있는 암자는 현대식으로 지은 절이다. 절벽같은 바위 위에 자리 잡은 유리광전과 나한전은 아찔해 보인다.  내 소원만 빌지 말고 남들과 밥 한 그릇 나누는 심정으로 쌀을 한 봉지 사서 들고 올라가니 유리광전에서 스님이 염불을 외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유리광전에서는 바위벽에 새겨진 유리벽 너머로 황금빛으로 그려진 약사여래불상을 볼 수 있다. 원효대사가 선정(禪定, 흐트러짐이 없는 마음)에 들 때 손톱으로 그렸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허공에 떠 있는 건물에 앉아있는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계속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은 의식이 되어 약사여래불을 바라보고 생각을 떨치는 수밖에 없다.  유리광전을 나와 종무소 위로 올라가면 나한전, 지장전, 소원바위, 도선굴 등을 볼 수 있다.  섬진강과 구례읍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사성암은 원효대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대각국사 등 네 분이 좌선을 하며 도를 닦은 곳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풍광이 좋다.  멀리 섬진강 너머로 지리산이 보인다.  

 

 

  어쩌다 보니 하루에 절을 세 곳이나 방문하게 되었다.  절이 풍광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보니 가다 보면 거기에 절이 있다.  향일암은 3,000원, 화엄사는 4,000원, 사성암은 문화재관람료를 내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절에 들르지 않아도 문화재관람료를 내지 않으면 통행을 할 수 없는 곳도 있다.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가 불교계로부터 뭇매를 맞은 정치인도 있었다. 그런데 2023년 5월 문화재보호법이 개정되면서 문화재관람료가 전면 폐지될 예정이라고 한다. 419억 원을 예산을 들여 문화재 보호를 위해 활용할 예정이라고 하니 문화재관람료에 대한 설왕설래도 이젠 옛말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풍광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절의 문화재들이 이제라도 정부 예산에 의해 보호될 수 있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향일암은 동백이 피고, 철이른 진달래도 피었다.  그 자체가 위로다. 화엄사는 시작과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지리산 아래서 화엄사를 찾는 이들에게 따뜻한 차로 위로를 건넨다.  사성암은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수고했다며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노라고 부처를 닮은 바위가 소원을 물어본다.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위로받기에는 절이 안성맞춤이다.  다만 방문하는 이들이 적은 평일에 가기를 권한다. 거기서도 붐벼서 스트레스를 안고 올 수는 없지 않은가. 

 

여수 향일암

 

구례 화엄사 강당 보제루
구례 사성암 유리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