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
너도 나도 동안이 좋다고 한다. 동안 열풍은 그 시작점을 찾아가면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로 이어진다. 종교에 구속되었던 중세에서 벗어나 자본주의가 세상을 좌우하기 시작하면서 선을 넘어서는 '인간의 자유'를 선언하였다. 이는 어른의 권위의 추락으로 이어졌고 급기야는 아이들이 가장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안을 선호하는 현상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이 중심 사회는 과연 옳은가? 포퓰리즘은 아이 중심 사회의 표방이 아닐까? 우리 사회에 어른은 필요하지 않은가?
아이 중심 사회는 무엇이 문제인가? 고대 그리스 사회는 평균 수명이 30대 후반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태어나서 7세가 넘어서면 어른들과 같이 대접받았고, 그들의 책임도 다해야 했다.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아동기는 청소년기까지 이어졌고 이제는 서른이 되어도 청연으로 취급된다. (그리스시대는 이미 살아있지 않은 나이다) 100세 시대가 도래한 이후 인터넷 보급에 아이와 성인의 경계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여기에 인권의 개념이 더해지면서 아이는 보호와 우선의 대상으로만 인식되고 심지어 부모는 양육과 교육에서 지녀야 할 권위를 벗어버렸다. 이로 인해 아이는 부모를 인권으로 신고하고, 교사를 신고하게 되었으며 어른은 학대 범죄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양육과 교육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를 쓴 다비드에버하르드는 '아이를 눈높이에서 대하는 부모는 아이 같은 어른을 길러내고 있다 아이가 어른을 보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점진적으로 학습할 기회를 갖는다. 육아는 어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이지 아이와 어떤 게임을 하며 놀지를 정하는 과정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국의 부모는 아동 중심에서 집시 중심으로의 이중적인 양육태도를 갖고 있다. 아동 중심 사고와 행동은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이를 존중하는 양육, 교육의 자세는 필요하지만 '아이에 머무르는 어른'즉, 겉모습은 어른이고 내면은 아이인 어른을 길러내지 않아야 한다. 그 어른이 다음 세대를 이끌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 좌절하고 자포자기하거나 사회와 부모를 탓하는 자기중심적인 어른들이 가득한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다.
아이의 인권을 존중하는 양육과 교육의 자세는 좋은 일이다. 좋은 의도가 가장 큰 권력을 갖고 어른과 교사가 아이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양육도 교육도 이루어질 수 없다. 애정에 근거한 훈육은 아이들을 성장하게 할 것이다. 권위주의 세상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권위 있는 부모, 권위 있는 어른의 모습이 아이들을 성숙한 인격을 가진 어른으로 길러낸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말이다.
나는 이번 이태원 사고의 원인을 포퓰리즘에 기인한다고 본다. 공권력이 작동할 수 없는 한국 경찰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없다.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흐르고 있어서 모든 행정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국가적인 낭비가 결국 포퓰리즘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국가는 보호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 나가는 동력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