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에 따라 물을 담듯이
대기업 비서실에서 일할 때 회장과 나 사이에 세분의 상사가 있었다. 모두 내로라하는 실력자에다 개성도 뚜렷했다. 나는 같은 내용도 세분의 취향에 맞게 각색해서 보고했다.
말은 상대적이다. 같은 말에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
어느 상사는 느슨한 보고를 싫어한다. 보고는 짧고 밀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 철칙이다. 이분 방에 보고하러 들어갈 때는 인사도 생략한다. 보고는 절대 3분을 넘기면 안된다. 자칫 농담이라도 할라치면 당신 그렇게 한가해요? 핀잔이 돌아온다.
이에 반해 또 다른 상사는 결론부터 보고하는 걸 싫어한다. 왜 그렇게 사람이 급해? 이리 앉아봐. 어떻게 지내는지? 요즘 회사 분위기는 어떤지 이것저것 묻는다. 이분에게 보고하러 갈라치면 정작 보고 내용보다 이분의 관심가질 만한 여담거리를 많이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담이 재미있으면 본론은 그냥 통과된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보수적인 사람에게 새롭게 도전하자는 말은 잘 먹히지 않는다. 대신 이런 핀잔이 돌아온다.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만. 나는 뭐 그런 생각 없어서 안 하는 줄 알아.
현실적인 사람에게 이상적인 청사진을 그리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이런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또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이익을 강조하면 속물 취급을 당할 수도 있구요.
우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지는 충분히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어떤 사람이 듣는지 그가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뒷전인 경우가 많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데 말이지요. 말은 내가 하는 것이니 내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말은 하기 직전까지만 내 것입니다. 물을 담기 전에는 물병의 모양을 잘 봐야 합니다. 입구가 좁은지 넓은지 물은 얼마나 담길지. 말하기도 그런 겁니다.
(2020년 kbs라디오 강원국의 말 같은 말에서 옮겨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