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옷에서도 무채색 계열의 비중이 상당하다는 것을 쉽게 발견한다. 더운 여름날인데도 검은색, 흰색, 회색의 옷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채우고 있다. 겨울에는 검은색 패딩으로 감싸고 다니던 이들이 이제 다시 검은색 티셔츠와 반바지, 흰색 운동화로 갈아입었을 뿐이다. 심플하다, 럭셔리하다, 시크하다는 패션 리더들의 옷 입기를 따라 하는 단순한 패션 트렌드를 넘어, 우리 사회와 아이들의 심리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아닐까?
무채색 옷의 인기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우선 실용적인 측면이 크다. 무채색은 어떤 색상의 옷과도 쉽게 어울려 코디가 용이하며, 자주 입어도 눈에 띄지 않아 '돌려 입기'에 편리하다. 또한 유행을 덜 타는 경향이 있어 경제적이라는 인식도 있다. 깔끔하고 미니멀한 느낌은 세련된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요즘은 다들 심플하게 입는 게 유행이에요.” 이런 유행은 타인의 시선을 심하게 의식하는 사춘기 아이들을 넘어서 초등학교 5~6학년, 중학교 학생, 고등학교 학생들도 엇비슷하다.
그러나 아이들의 관점에서 색은 단순한 옷의 기능을 넘어선다. 색은 아이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세상을 인지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빨간색에서 에너지를 느끼고, 파란색에서 안정감을 얻으며, 노란색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등 색은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깊이 관여한다. 만약 아이가 다양한 색깔을 경험하고 선택할 기회를 제한받고 무채색 위주의 환경에 노출된다면, 이는 아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는 데 서툴러지거나, 특정 색이 주는 긍정적 에너지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제한적인 색 경험이 아이들의 감정 표현 방식이나 에너지 수준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무채색 옷 선호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튀는 것'보다는 '무난함'과 '평균'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집단 속에서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는 아이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색깔보다는 안전하고 눈에 띄지 않는 무채색을 선택하게 될 수 있다. 이는 아이들이 자신의 개성을 탐색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2019.1.10.연합뉴스에서 발췌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옷 색깔은 검정, 파랑, 하양, 빨강, 남색, 녹색, 회색, 분홍, 노랑, 보라 순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사실은 2004년과 2014년에 조사 결과가 같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2019. 1.10.) 반면, 미국인들은 파랑을 선호하되 안개가 자주 끼는 지역은 회색을 선호하지 않고, 마이애미처럼 뜨거운 지역은 시원한 회색을 선호한다. 일본인들은 원색 보다 검정, 회색, 흰색의 무채색 계열과 채도가 낮은 색상, 파스텔 톤을 선호한다. 중극은 빨강을 선호했으나 현재는 부드러운 색상을 선호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한국처럼 인구가 조밀한 지역의 집단적인 특징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어려서부터 색을 다양하게 쓰는 경험이 적다 보니 빨강, 노랑 등 튀는 색상을 어색해하고 부담스러워한다. “고 CCI색채연구소 소장 신향선 씨는 말한다.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과정은 곧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옷 색깔을 선택하는 작은 행위조차도 아이들에게는 자신을 표현하는 창의적인 활동이 될 수 있다. 다양한 색을 조합하고 실험하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배우고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나 만약 아이들이 무채색이라는 틀 안에 갇혀 색을 통한 자기표현의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다면, 이는 단순히 옷 색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연습,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용기, 틀을 깨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창의적인 사고의 발달이 저해될 수 있다.
물론 무채색 옷을 입는 모든 아이의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단정은 성급하다. 하지만 색깔이라는 강력한 시각적 표현 도구를 충분히 경험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환경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색깔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은 중요하다. 옷 색깔 선택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기, 만들기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아이들이 색의 풍요로움을 느끼고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도록 돕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운 여름날 초록의 나무 그늘 아래로 검은 옷을 위 아래로 입고 흰 운동화를 신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교복을 입은 거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아이들이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창의성을 마음껏 발현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다. 아이들의 옷 색깔에 담긴 숨겨진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우리 아이들의 세상이 무채색만이 아닌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어른들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가 잘 사는 나라가 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아이들의 창의성이 발휘되지 못하는 일률적인 문화는 잘 사는 나라가 아닐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다양한 옷으로 자신의 개성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