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수요일(시 큐레이터)

<읽히는 시> 나의 사랑하는 생활

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0. 11. 11. 21:37

나는 보드랍고 고운 화롯불 재를 만지기 좋아한다.

나는 남의 아내의 수달피 목도리를 만져보기 좋아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좀 미안한 생각을 한다.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수한 얼굴이 웃는 것도 좋아한다.

서영이 엄마가 자기 아이를 바라보고 웃는 얼굴도 좋아한다.

나 아는 여인들이 인사 대신으로 웃는 웃음을 나는 좋아한다.

-피천득- 나의 사랑하는 생활 중에서 발췌-

 

나는 이글을 내 나름으로 써 보기로 한다.

 

나는 구두소리를 좋아한다.

아스팔트 길 위를 또박또박 걷는 소리를 좋아한다.

빨간 바바리코트를 입고 구두 소리를 내며 걷는 것을 좋아한다.

은행나무가 고스란히 쌓은 일년의 흔적을 밟기를 좋아한다.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는 소리를 좋아한다.

나는 인사하기를 좋아한다.

아침에 아이들과 나누는 생기발랄한 인사를 좋아한다.

마스크 쓴 얼굴에 눈인사로 나누는 인사도 좋아한다.

유치원 아이의 맑은 눈인사는 더 좋다.

 

햇살 따뜻한 낮에 동네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박또박 걸어서 골목길을 들어서면 보이는 담너머로 노랗게 익은 탱자를 좋아한다.

나는 11월의 낙엽 태우는 내음을 좋아한다.

구수한 내음이 바닥에 깔리는 어스름 저녁도 좋아한다.

퇴근길에 하나둘 켜지는 아파트 창문의 불빛들도 좋아한다.

 

나는 화단에 핀 수국이 매일 매일 새롭게 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꽃잎이 점점 붉어지고, 잎사귀마저 꽃보다 붉어지는 수국을 좋아한다.

 

피천득님의 <인연>이라는 수필이 유명한데 이글 <나의 사랑하는 생활>은 바짝 긴장한 직장생활로 뭉친 근육들을 한꺼번에 무장해제시키는 글이다.

글 속에서 오렌지처럼 톡톡 터지는 새콤달콤함과 따뜻한 에너지를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글의 힘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