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색을 입히다 2025. 3. 3. 22:38

 

 "수제 빵이라니?  빵은 다 손으로 만드는 거 아냐?"

"요즘 공장식 빵도 있지.  마트에서 파는 빵은 대부분 공장에서 만들어. 크로와상도 생지형태로 팔잖아.  사서 굽기만 하면 되는 거지. "

"그럼, 수제빵은 빵집에서 만들어 판다는 말이구나. "

"맞아.  알고 보면 공장식 빵이 더 많을 걸."

 "요즘 마트에 가면 밀키트가 잘 나와서 그걸 사게 되니 점점 요리를 안 하게 돼."

  "그러니까 말야.  밀키트가 가격도 저렴하니까.  내가 보면 연세 드신 분들도 다들 밀키트를 사더라고. "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밀키트가 편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50대 남자는 먹는 게 낙(樂)인 미식가인데 50대 여자는 요리하기를 제일 싫어한단다. 그러니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다. 

 

  이번 겨울에는 연달아 요리에 관한 영화 두 편을 보았다.  <줄리 앤 줄리아>와 <프렌치 수프>다. 요리에 진심이며 숭고하기까지 한 음식에 대한 자세가 같다면 줄리는 요리가 즐겁고 행복하고 신나는 사람이었고,  줄리아는 그걸 되짚어가면서 삶의 기쁨을 찾았으며 프렌치수프의 도댕과 외제니는 요리에 정중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화답하였다. 

   

  <줄리앤 줄리아>는  대사관에서 일하는 남편을 따라  프랑스 파리에 살게 된 미국인 줄리가 프랑스 음식에 반해 요리학교인 꼬르동블루에 입학하여 배운 음식 레시피를 책으로 만든 이야기다.  미국에서 책을 내고, 비디오도 만들었다.  몇 십 년 후 비디오를 보게 된 줄리아가 두번째 주인공이다. 전화 상담을 맡은 공무원 줄리는 버너아웃에 이르렀다. 삶이 지켜가던 중에 오랫동안 간직했던  줄리의 음식 254개를 1년 동안  만들어서 블로그에 공개하는 미션을 시작하면서 새롭게 살아보려 한다. 줄리가 요리를 매일 실천하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요리로 두 사람의 시간이 연결된다. "줄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줄리도 이런 맛을 느꼈겠구나. 줄리도 오리 목을 비틀어서 구웠겠구나. 줄리도 산 채로 가재를 오리하느라 우당탕탕 했겠구나......"

 

  <프렌치 수프(french soup)>는 프랑스식 수프를 말하는데 그 이름은 포토푀(port of fire, 불에 올려 놓은 냄비)다.  소고기, 버섯, 양배추, 양파, 토마토, 소시지 등을 넣고 푹 끓여내는 음식으로 주로 아픈 사람을 위해 만들거나 영양식이다.  레스토랑 주인이자 미식가인 도댕과 20년 간 같이 음식을 연구하고 만들어 온 외제니는 연인이기도 하다.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별의 발견보다 행복에 더 크게 기여하죠."

"세 살에 절대 음감을 갖고, 다섯 살에 악보를 읽을 순 있어도 40살 이전에 미식가가 될 수 없다. "

 소 갈빗살, 베이컨, 홍피망, 버섯, 회향, 토마토, 오렌지, 와인, 파슬리, 타임, 월계수 잎, 거민, 노간주 나무 열매, 정향, 파프리카, 코냑, 까치밥나무 열매를 넣어 만든 부르기뇨트 소스와 같은 요리들을 만드는 부엌의 정갈한 화덕, 그 주변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도댕, 외제니, 비올레트, 폴린의 모습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는 듯하다. 매번 외제니가 도댕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면 외제니가 아프게 되자 도댕이 정성을 다해 외제니만을 위한 콩수프, 굴과 철갑상어알, 송로버섯을 넣은 닭, 50년 동안 바닷속에 있던 와인을 준비한다. 외제니가 죽고 도댕은 폴린과 음식을 연구한다.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중요해. 이 맛을 기억해."

 이 영화에서 또다른 발견이 두 가지 있다. 1800년 대로 짐작되는 시기인데 등장인물들은 모두 평등하다. 음식을 먹으러 오는 남자들은 요리사 외제니와 식탁에 같이 앉고 싶어 하고,  주인 도댕의 청혼을 여러 번 거절한 외제니는 자신이 원할 때만 도댕을 만난다.  사랑, 존경, 평등이 자리 잡은 분위기에서 만들어내는 요리의 과정은 숭고하다.  <프렌치 수프> 영화에는 음악이 딱 한 곡만 나온다. 마스네 작곡의 <타이스의 명상곡>이다.  타이스라는 여성이 타락한 생활을 하는 걸 보고 수도승이 그녀에게 수도원 생활을 권한다. 타이스는 명상을 거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수도원임을 알고 수도원에 들어간다. 반면 수도승은 타이스로 인해 번민하고 괴로워한다. 결국 타이스는 병으로 수도원에서 죽고, 수도승은 그를 알고 슬퍼한다는 내용의 스토리 주인공이 타이스다.  쇼팽의 녹턴과 흡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헛갈릴만하다. 

 

    마트에 가면 고추장, 된장, 간장부터 알 수 없는 조미료들이 점점 늘어가는 반면 가정에서의 요리시간과 요리 횟수는 점점 줄어드는 아이러니가 있다.  가급적 밀키트에 담긴 재료를 구입하지 않고,  김치찌개, 된장찌개, 청국장, 미역국, 시래기국 등 집밥을 만들어 먹으려 한다. 건강도 챙겨야겠고, 한국 전통 음식 문화가 밀키트에 밀려 사라진다면 결국 공장식 빵만 남고 수제빵은 사라지는 빵 문화와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다.  50대 여성인 나는 요리를 싫어하지만 푹 끓여내는 수프 같은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기에 싫어하는 마음을 눌러보려 한다.  <줄리앤 줄리아>와 <프렌치 수프>와 같은 숭고한 음식은 아니더라도 따뜻하고 기분 좋은 음식을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만들고 싶은 마음이 조금 생겼다.  음식이 문화이고 잊히면 안 되며 집 안의 온기는 부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저녁 요리로 무와 소고기, 마늘, 파, 청양고추를 곁들여 소고기무국을  끓였다.